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13세손 윤승례 선생은 영평군 윤척(鈴平君 尹陟 )의 자(尹承休, 承度, 承順, 承慶,承禮) 오형제 중 끝분으로서 장단군 장목동(현장단군 진동면 작목리)에서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 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 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 웠으며 창왕 1년(1389)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명제(明帝)지시에 따라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다. 이어 판개성부 사(判開城府事)와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 공양왕 4년(1392) 파산에 은거하 시다 돌아가시니 작목동 묘좌에 안장 후 순충보조공신과 문충으로 시호를 받으신 충신이시다.
따라서 그의 아들 중 윤번선생은 우왕10년(1384)에 출 생하시어 공양왕 4년(1392) 조선조 개국후 음보(陰補)로 신천 현감을 거쳐 세종10 년(1428)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이르러 딸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결혼을 하게되자 어머니(安東權氏)를 모시고 한양으로 올라와 살게 되었으며 군기시부 정(軍器寺副正)에 승진, 이어 이조참의 공조참판 호조 참판을 역임하는 동안 세종 5년 친상(母親)을 당하매 사폐지지인 파주군 교하면 당하리에 안장하게 되었다. 세종21년(1439) 경기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성 우참찬이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중추원사 세종29년(144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세종30년(1448) 7월 14일 65세로 돌아가시니 교하면 당하리 어머니 묘 앞에 예장을 모신 후 파평부 원군과 이정으로 시호를 받으시었다. 이로 인하여 판도공파 후손들이 이곳에 정 착하게 되었다.
단종4년(1456) 수양대군이 세조대왕이 되자 정희왕 (尹의 딸)로 추봉하게 되자 이분들의 후손들 중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尹士昨, 甫, 元衡) 정승판서와 당상관들이 7,8대에 걸쳐 수십명이 배출된 문한 가로 수백호에 대성가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차에 걸친 난 시로 인하여 실전하였던 윤관장군(尹瓘將軍)묘를 관하 광탄면 분수리에서 차저 수호관리하는 한편 지방문화재로 승격시키면서 여충사를 건립 유림향사로 승 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현재는 전국적으로 이분의 후손 수백명이 모여 매년 향사를 울리는 실정이며 따라서 파평윤씨 중 앙회장 윤성민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988년 2월 27일 국가문화재 제323호로 승 격하게 되었다.
또한 별지와 같이 선대에 실존된 선조 중 관하 법원읍 웅담리 상 서대에 신위(神位) 3위와 7위분의 비를 설단하는데 있어서도 판도공파 종중에서 적극적인 협조와 주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종사라 하겠다. 파평윤씨 역사집람 오책1권(繹史輯覽五冊一券)에 의하면 영평군 윤섭(鈴平君 尹涉) 묘는 장단 동 저가사리 경좌(長湍東渚加士里庚坐)에 장례를 모시고 그의 자 승례(承禮)는 장 단조목동묘좌(長湍祚木洞卯坐)로 명시되었으나 6·25동란으로 남북이 가로막히는 한편 군사 보호지역으로서 성묘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나 문화체육부 문화재 관리국 학술연구회원들에 의해 장단지역을 답사 중 아래 판도공 묘를 찾게 되어 공개하는 바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