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08일
(137)임진왜란 때 전사한 윤흥신공
임진왜란 때 전사한 윤흥신공
다대포첨사 윤흥신공이 왜군을 막다가 전사하였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백 5십여년이 지난 영조때 고구마의 전래자이고 본인의 방조傍祖 조엄趙曮이 고증발굴하여 충렬사에 배향시킨 경위를 적은 글.
이 글은 본인의 방계선조傍系先祖 분들의 글로써 본인에게 번역을 의뢰하였기에 번역을 하다 보니 똑같이 나라위하여 희생되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묻혀버리었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이와같이 묻힌 것을 발굴한 우리 방조의 공도 갸륵하고 뒤미쳐라도 새상에 알려져서 나라위한 희생이 묻혀버리지 않고 빛을 보게 된 당사자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본인은 이 글을 여기 올려서 이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조금의 밑거름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2009. 7. 7. 번역자 : 조면희趙冕熙
<一>다대포첨사윤공전망사적서多大浦僉使尹公戰亡事蹟敍
일찍이 <징비록懲毖錄>을 보니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라고 쓰여 있고, 또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왜적이 병력을 나누어 서쪽으로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그 때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힘껏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었다.
<징비록>은 바로 선조 때 정승인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바로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 신경申炅(象村 申欽의 손자)이 지은 책이다. 이는 모두 왜란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증거가 있어서 쓴 것일 것이므로 가히 믿을 만하였다.
임진왜란이 난지 166년이 지난 정축년(1757년, 영조 33년)에 내가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관아에 부임하던 다음날 ‘충렬사忠烈祠’를 배알하였는데 그 충렬사는 곧 임난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宋象賢공과 부산 첨사釜山僉使였던 정발鄭撥공의 신위를 모신 곳이었다.
윤흥신공도 임난 당시 앞서 말한 두 분과 같은 곳에 있었고 또 함께 훌륭한 일을 하다가 순국殉國하였으니 그 공적을 숭배하고 갚기기 위하여 사당에 제향하는 은전恩典을 똑같이 베풀어 마땅하다. 그런데 두 분은 한 사당에서 나란히 제향을 받을 뿐 아니라 당시 함께 순국하였던 관아의 아전이나 노예奴隸들까지도 제사를 지내어주는데 윤흥신공만이 홀로 그곳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읍지邑誌’를 상고해 보고 또 다대포를 비롯하여 여러 포진浦鎭을 찾아 탐문해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도 막연하였고 그의 후예後裔들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새로운 사실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분의 의리와 충렬이 드러나지 못하고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라질 것임을 안타까워하였다.
신사년(4년 뒤임) 봄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도내道內에서 ‘효열절의孝烈節義’가 두드러진 사람을 낱낱이 추천 받아서 칭찬할 만한 사람을 골라 포상褒賞하여 주자는 내용으로 임금에게 장계로 청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윤흥신공의 일이다. 그리하여 예부[禮曹]로부터 증직贈職을 해주자는 제목題目을 덧붙여 정부[議政府]에 보고되고 정부에서는 임금님에게 재심해 달라는 주청[覆奏]를 올려 조만간에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마는 그래도 나의 마음에 미흡한 것은 그의 사적이 자세히 갖추어진 것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근일에 우연히 팔곡 구사맹八谷具思孟이 쓴 <조망록吊亡錄>을 읽다가 그 책의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 첨사 윤흥신에 대하여 특별히 갈라서 써놓고 그 해설에 이르기를 ‘왜적이 성을 둘러쌌는데 힘껏 싸워 물리쳤다’라고 하고 그 아래 또 쓰여 있기를 ‘내일 만일 많은 적병이 와서 공격하면 견디기 어려울 터이니 성을 버리고 나가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누군가 말하니 흥신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도망가겠는가?’라고하였는데 과연 많은 적이 몰려오자 군졸들은 모두 도망가고 윤공만 홀로 종일 적을 향하여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또 시詩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奔亡列邑已全空 : 여러 고을들은 모두 도망가서 텅텅 비었는데
分死危言獨效忠 : 죽는 것이 분수라는 말로 혼자 충절을 다했네.
麾下若敎終未散 : 휘하의 군졸들로 흩어지지만 못하도록 했다면
孤城猶足策奇功 : 외로운 성이라도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을.‘
하여, 이 책에서 윤공의 공적이 훌륭하다는 사실이 <징비록>이나 <재조번방록>보다 더욱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리하여 공이 남긴 충렬은 여기에서 더욱 빛나고 두드러져서 앞으로 천년만년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일 것이다. 이러한 데도 충렬사의 제사에 함께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공의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하겠는가? 그런데 절개와 의리가 드러난다든가 묻혀버리는 일도 각각 때가 있어 그런가?
내가 계미년(1763년, 영조 39년)에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 때 임진년의 변고[龍蛇之變]를 도리켜 생각하니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갑절도 더 되었다. 그리고 충렬忠烈을 다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그분들의 업적을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였다. 그 때 나는 함께 갔던 막료幕僚들과 이러한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서로 한탄하기도 하였다. 막료 중에 수령守令을 역임한 이해문李海文은 무사[壯士]이면서도 시詩를 잘하였다. 곁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더욱 분하고 원통함을 나타내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다대포 첨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윤흥신공의 의열義烈이 사라져 없어질 것을 애석히 여겨 사수四首의 율시律詩를 지어 가지고, 편지에 동봉하여 내개 보고하고 나의 글[序文]을 얻어서 관아의 벽에 걸어두겠다고 하였다. 그의 뜻은 실로 변방의 선비들을 고무[聳動]시키고 윤공을 드러내어 빛나게 하는데 있었다. 이는 과거 십년 동안 내가 가진 본래의 뜻이기도 했다. 비록 아직도 조정으로부터 나의 장청狀請이 허락을 받지 못하여 송정宋鄭 두분과 함께 충렬사에 배향하도록 하지는 못하였지마는 지금 본진本鎭인 다대포의 벽에 찬양하는 시를 걸어 놓겠다고 하는 제안을 내가 문장이 미숙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전후의 사실을 대강 주어 맞추어 앞에 쓴 것과 같이 기록한다.
숭정기원후 백삼십팔년(1766년, 영조 42년) 원임행부제학 조엄 찬
崇禎紀元後 百三十八年 原任行副提學 趙曮 撰
<二>첨사윤흥신순절비문僉使尹興信殉節碑文
옛날 임진왜란 당시 제일 먼저 왜군의 공격을 받아 순직한 사람은 동래진東萊鎭 주위로서 수령들만 십 수十數 명이 된다. 그렇게 순절한 희생자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래부사인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다대포多大浦의 윤흥신공으로 이들은 모두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신하들이다. 뒤에 동래부에서는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송공과 정공은 사당에 모셔 제사지내었지마는 윤공은 고향 집에 정려旌閭만 했었다.
처음에 왜구倭寇가 부산을 함락시키고 병력을 나누어 다대포를 포위하자 공이 힘써 막았다. 그때 군리軍吏가 와서 말하기를 ‘적들이 모두 몰려올 터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이 꾸짖기를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와 공격하자 다대포 군대는 마침내 무너져 흩어지고 공만이 혼자 남아 종일 적을 향하여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이 사실은 뒷날 팔곡 구사맹공八谷具思孟公이 <조망록弔亡錄>을 쓸 때 사실을 자세히 갖추어 기술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공은 찬성贊成 윤임尹任의 아들로서 형제가 6인인데 그 중 3형제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죽었다. 윤공이 다대포진에 부임할 때는 서제庶弟인 흥제興悌가 따라 왔었는데 왜적이 윤공에게 달려들어 칼날로 내리칠 때 흥제는 윤공을 부둥켜안고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도 형을 하도 꽉 끌어안고 있어서 마침내 관에 함께 넣어 장사지냈다’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강렬하게 끌어안았으면 이렇게 하였겠는가?
그 뒤 백여 년이 지나서 우리 선대부先大夫(아버지 曮)께서 동래부사로 부임해 왔다가 이어서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오셨다. 그리고 윤공의 사적을 매우 익숙히 들어서 알았다. 그러나 윤공이 송宋 정鄭 두 분의 사당祠堂에 참여하지 못하고 빠진 것을 민망히 여겨 조정에 아뢰어 가지고 오랜 뒤에 마침내 그 일은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다대포첨사 이해문李海文도 마침 일본 사절로 따라 갔었는데 그가 이곳 다대포 첨사로 부임할 때 선대부께서 윤공의 사적을 기술하여 그 글을 벽에 걸어두게 하고 또 비석도 세우도록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이해문공이 떠나고 그 뒤에 다대포진의 첨사로 부임한 사람들은 모두 속된 관리들이므로 이일을 말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이일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이해문공이 세웠다는 비석을 찾아가 보았으나 다대포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 역사役事가 결국 없어져 버릴까 두려워 이 글을 써서 옛 사람의 공적을 빛내도록 하는데 있어서 이해문공과 같이 의리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보국숭록대부 판돈령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輔國崇祿大夫 判敦寧府事 兼 吏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조진관趙鎭寬 찬撰
<三>첨사윤흥신순절비건립겨위서僉使尹興信殉節碑建立經緯書
종응이 장산萇山(東萊府의 옛이름) 부사로 부임해 갈 때 지금의 상국(相國 : 정승) 운석 조공(雲石 : 趙寅永의 호, 조진관의 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동래부에는 충렬사가 있어서 예로부터 송정宋鄭 두 충신을 배향하였는데 윤공이 함께 배향된 것은 나의 조부[先大父]로부터 시작되었네. 우리 선군자(先君子 : 돌아가신 아버지, 진관)께서 윤공의 사적을 기술하였는데 아직까지 비석에 새기지 못하여 비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네. 자네는 나를 위해 그 일을 계획해 보게.”
하였다.
내가 이곳 동래에 부임하여 윤공의 유적에 감동을 받아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아하! 잘 못 된 법전을 닦고 빠뜨린 사적을 보충한 것은 운석공께서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이룬 것이고, 충절을 드러내어 표하는 일은 역시 지역을 지키는 수령守令인 나의 책임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이일을 완성시켰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신축(1841년, 헌종 7년) 4월 일
지부(知府 : 부사) 홍종응洪鍾應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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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충렬사 (동래)
'''충렬사'''(忠烈祠)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송상현(宋象賢)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송상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東萊城)과 운명을 같이한 당시의 동래부사이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처음으로 건립하였고, [[1624년]]([[인조]] 2) 사액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부산진성싸움에서 전사한 정발(鄭撥)이 배향되었으며,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별사(別祠)를 건립하였다. [[1735년]]([[영조]] 11) 임진왜란 때 순절한 여러 사람을 모셔다가 합향(合享)하였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 순사한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을 추배하였다. ---인터넷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