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대 : 1841년(헌종7년)
■ 높 이 : 194cm
■ 너 비 : 62cm
■ 두 께 : 26cm
■ 출토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24번지
■ 찬자/서자/각자 : 조진관(趙鎭寬)/미상/미상
■ 비문내용(번역)
옛날 임진왜란시 동래(東萊)가 가장 먼저 그 칼날을 받았으므로 동래를 둘러싼 진(鎭)의 수신(守臣) 십여 명이 순절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의 정발(鄭撥)이었고, 다대포에는 윤공흥신(尹公興信)이 있었는데 당시에 동래 첨사(僉使)였다.
동래부의 사람들이 충렬사를 세워 송상현과 정발, 두 분을 배향하였으나 공은 그 집안에만 정려(旌閭)하였다. 처음에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고서 군대를 나누어 다대포를 포위하였다. 그때 공이 힘써 왜적을 물리쳤는데, 군리(軍吏 군대에 딸린 문관)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왜적이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피하는 것보다 나흔 계책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꾸짖어 이르기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왜적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자 군병을 소집하였으나 대열은 무너지고 흩어져 버렸다. 공은 홀로 종일토록 왜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뒤에 팔곡(八谷) 구공사맹(具公思孟)이 조망록(弔亡錄)을 지어 그때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때의 일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공은 찬성(贊成)을 지낸 윤임(尹任)의 아들이다. 형제가 여섯인데 그 중에서 세 사람이 을사년(인종1,1545년)에 화를 당했다. 공이 다대포진에 달려갔을 때에 서제(庶弟)인 윤 흥제(尹興悌)가 함께 따라갔는데 왜적이 공을 위협하여 시퍼런 칼날을 마구 휘두르자 윤흥제가 공을 끌어안고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끌어안은 것이 어찌나 견고 하던지 끝내 풀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함께 관에 넣어 하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기이하고 장렬한가.
백여 년이 지난 뒤에 우리 선대부께서 동래 부사가 되어 계속해서 일본에 통신사로 가게 되었는데, 그는 공의 일을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었으며 공이 송상현과 정발의 사당에 빠져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였었다. 그래서 조정에 아뢰니 오래 지난일이 마침내 시행되게 되었다. 그 때 이후해문(李侯海文)이 통신사의 상객(上客)이었는데, 이 다대포진의 사람들이 이 역사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 비문을 지어서 충의를 사모하는 것이 이후 같은 자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보국숭록대부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조진관은 비문을 짓다.
내가 장산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을때 지금의 상국인 운석 조공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동래부에는 충렬사가 있다. 옛날에는 송상현과 정발, 두 신하만을 배향하다가 윤공을 아울러 배향하게 되었는데, 우리 선대부로부터 시작하여 선군자께서 그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비석이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빠져있는 것이 애석하다. 그래서 아들이 나를 위하여 그 일을 도모한다."라고 하였다. 이 땅에 부임하게 되어 남은 자취를 보고 생각하는 바 가 있어 속히 돌을 깍아서 비석을 세웠다.
아! 쇠퇴해진 의식을 고치고 기록에서 빠져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바로 잡은 것은 대체로운석이 선대의 뜻을 이룬 것이요, 충절을 드러내어 표창하는것 또한 수신의 책무인 것이니, 마침내 기쁘게 그와 함께 이 일을 완성하였다.
승정원기원후 네 번째 신축년(헌종 7, 1841년) 4월 일에 동래 부사 홍종응은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