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처가(은현면 하패리, 월계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와룡재(臥龍齊)가 있다.
처가에 다녀올때 종종 스치며 보았던 곳인데 이번에 운좋게 기회가 되어 한번 들러 보았다.
궁금한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항상 발길이 끌리곤 했는데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야 궁금증을 풀 기회가 된 것이다.
입구에 세워진 와룡재(臥龍齊) 안내비
사당(숙문사)과 신도비각 전경
와룡재 바로 앞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고 약 10여대의 차를 주차할 공간이 조성되어있었다.
주차장 정면에는 재실로 보이는는 건물 한채와
묘소 바로 아래에 아직 누군지 파악은 못했지만 공적비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재실
주차장에서 돌 계단을 몇 칸 오르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주는 안내간판이 설치되어 있다.
송질(宋軼 1454 단종2년~1520 숙종15년),
역사에 기록된 그는 경기도 관찰사와 영의정까지 지낸 조선전기의 인물이지만 평은 그다지 좋은 인물은 아닌듯 싶다.
성격은 준엄하고 강직하나 고래로 관료의 금기사항인 재물에 대한 욕심과 과 협작이 그를 평가 절하 시키는 결정적 요소였던 듯 하다.
예조판서 당시 중종반정(1506)에 가담함으로써 고속 승진의 기회를 잡고, 특히 말년에는 탐욕이 극에 달했고 결국엔 탄핵까지 받았던 것으로 보아 그의 인물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송질 선생 묘및 신도비 안내간판
신도비(긴 세월의 흐름이 비문의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게 한다.)
비각에서 내려다본 재실 전경
총 3기의 묘가 있는데 맨 위가 숙정공(肅靖公) 송질 선생의 묘이다.
묘의 형태와 곡장, 묘비, 문인석의 형태등이 남다르다.
곡장 뒤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멀리 보이는 것이 마을 관통로이다. 좌측방향은 하패리 방향, 우측 방향은 은현면 소재지이다.)
1513년 중종8년 10월, 성희안의 뒤를이어 영의정에 오른 송질은, 고려때 추밀원부사에 추증된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하는 여산(礪山)송씨가문에서, 단종때 종친부도정벼슬을 한 송공손(宋恭孫)의 아들로, 경상도 밀양의 외조부 박겸형(朴謙亨)집에서 태어났다.
송질은 성종8년 생원시와 진사시를 거쳐 같은 해 대과에 올라 첫 관직으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485년 송질은 오늘날 감사원의 중간간부 쯤인 사헌부지평에 올랐는데, 이때 나라에서 재정확보를 위해 지방수령들로 하여금 토호(土豪)들이 가진 장리곡을 철저히 조사, 본 주인들의 소용량을 제한 나머지는 모두 관청에서 관리하도록 하는 시책을 펼치는데, 송질이 이일을 총 지휘하여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 농장을 가진 재상들은 생산된 곡물의 일정량을 스스로 나라에 바치도록하는 방안을 주장, 이를 성사시켜 조정의 재정운영에 기여하였다. 이리하여 능력을 과시한 송질은 벼슬길이 매우 순조로 왔다.
이어 송질은 병조정랑을 거쳐 부승지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 연산군2년에는 우승지로 승진, 연산군을 가까이서 보필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형조·공조·호조·이조의 참판을 두루 거치면서,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 오기도하고, 동지춘추관사와 지의금부사를 겸해 직무를 능동적으로 처리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송질은 50세에 예조판서가 되어 육조의 수장자리에 들었고, 이어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함경도체찰사를 거쳐 곧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을 거쳐 60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송질은 젊었을 때와는 달리 나이 들고 직위가 높아지자 탐욕에 빠진 것 같았다. 결국 대간들로부터 욕심이 많고 행동거지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받게 되니, 송질도 마음에 가책을 느껴 누차 사직을 원한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영의정에 오른지 꼭 1년만에 만인의 손까락질을 받은 몸으로 권좌에서 사라진 셈이 되고 말았다.
초심(初心)을 잃은 탓이었다. 인생은 눈밭에 찍힌 기러기발자국이라 했는데, 무엇을 남기려고 원망을 샀는지, 그는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았다.
<국역중종실록>9권에 실린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올린 송질에 대한 탄핵상소문의 내용이다. 『송질은 도량과 식견이 평범하고 용렬하며, 지조와 취향이 추잡하여, 자기집만 생각하고 국사는 도모하지 않으며, 사(私)만 돌보고 공(公)은 돌보지 아니하니, 재덕이나 공로도 없이 직책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녹봉만 받으니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흉함이 있을 것입니다』. 앞서 송질이 영의정에 오른 이듬해 3월, 양사(兩司)가 같이 송질의 직위가 합당하지 않음을 들어 왕에게 주달한 내용이 <국역연려실기술>에 이렇게 실려 전한다. 『질은 본래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자로써, 재상까지 이르렀으나 한가지 착한 일도 가히 일컬을 것이 없고, 집을 흥덕동에 지을 때 아버지상복을 입고서 남여(藍輿)를 타고, 대낮에 왕래하면서도 뻔뻔스럽고 거리낌이 없었다. 별장을 영유(永柔)땅에 두고 수령에게 청해 관인들을 시켜 집을 수리하게하고, 또 평안병사 이윤검(李允儉)에게 물품을 청구하니, 윤검은 본래 아첨을 잘 하는지라 배를 많이 만들어서 가득 실어 보내니, 배로 운반하고 수레로 실어들인 뇌물이 한이 없습니다.…』
또 송질의 중종반정공신책록에 대하여 조광조 등은 “송질같은 자는 연산에게 사랑을 받아서 벼슬이 숭품에 이르렀다가, 반정하는 날 분주히 뛰어와서 공신에 참례했다.”며, 상소를 올려, 송질에게 공신록에서 삭제되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뒤에 조광조가 패한 뒤 다시 복작되기는 해도 흠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뒤에 조광조를 죽이자는 훈구대신들의 의논에 송질은 참여하지 않았다.
중종15년 1월, 송질은 67세로 숨졌다. 시호는 숙정공(肅靖公)이다.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선암리에 부인 남원양씨와 합장으로 된 그의 묘소가 향토유적으로 관리 되고 있다. 형조판서 성세창(成世昌)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에 이런 긍정적인 내용도 있다. 『…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커서 가슴속이 막히지 않고 트여 있었다. 신장은 보통사람을 넘지 않으나 바라보면 마치 산악같이 중후하였으며, 평소에 해학을 섞어서 말씀하시니, 화목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송질은 지한(之翰)·지간(之幹)·지정(之禎)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지한은 영의정 남곤의 사위로 관직은 부사였다. 송지한의 아들로 곧 송질의 장손자가 되는 인(寅)이 있어, 송인은 중종임금의 사위가 되어 벼슬은 명종때 도총관에 이르렀다. 송질은 딸도 셋을 두었는데 막내딸이 훗날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아내였고, 그가 낳은 아들 홍섬(洪暹)이 또한 선조때 세 번이나 영의정까지 오르니, 송질은 임금과 사돈인 데다, 영의정과 사돈, 사위도 영의정, 외손자도 영의정인 비길데 없는 화려한 인연을 남긴 인물로 들어 났고, 홍언필의 아내인 송질의 딸을 두고, 사람들은 “영의정의 딸로 태어나 영의정에게 시집가더니, 영의정아들을 낳았다”며 매우 기특해 하였다.
'삶과여유 > 역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 지폐 변천사, 1902년부터 지금까지 (0) | 2011.11.20 |
---|---|
[스크랩]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0) | 2011.11.07 |
[스크랩] 한국 핵개발의 비사 (우국충정) (0) | 2011.08.25 |
한국의 성씨 일람표 (0) | 2011.05.07 |
신라왕 계보(BC 57 ~ 서기936) (0) | 2011.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