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흔적/창작도움자료

[스크랩] 시, 나는 이렇게 쓴다 /이만섭

은빛사연 2012. 1. 22. 01:32

 

 

 

시, 나는 이렇게 쓴다  /이만섭

 

  

 

안녕하십니까? 이만섭입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시에 대한 얘길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시, 어떻게 쓸 것인가. 시, 나는 이렇게 쓴다. >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만, 먼저 양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시를 창작하는데 있어 이론은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그래서 시창작에는 방법론이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쓰고 또 쓰 고 오랜 습작과 퇴고, 숙성을 통해서 좋은 시가 탄생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입니다만, 이 점은 시를 쓰는 분들에게 한편은 이점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갓 방법론으로 답안을 찾는다면 누구나 노력하지 않고도 작품을 얻을 수 있는 불로소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래서 시는 지식이나 학문과는 별개로, 언어를 통해 드러내는 가장 순결한 진리의 보루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정의는 내리지 못한다 해도 한번 개념 정도는 짚고 넘어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시에 대한 구구한 명언들은 참 많지요. 시는 `은율적 미의 창조이다,` 이 말은 에너벨리라는 시로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작가 에드가 엘런 포우 (1823-1847)의 말입니다만,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의 한사람인 셀리는 또 시라는 것은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 의 이미지다`, 또 `시는 가장 행복한 심성의 최고열락의 순간을 표현한 기록 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그밖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는 한마디로 체험이다,` 라고도 하고, 그러나 이런 명언명구의 아포리즘은 서양시관일터이고, 동양의 시적 사관은 좀 정적인 것 같습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장가 서거정은 그의 저서 동인시화에서 시경의 말을 빌러 시자심지발(詩者心之發)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곧 시라는 것은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서거정은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라고 하며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사람의 정곡을 파헤친 매우 적절한 촌철의 평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곧 드러난 것보다 감춰 있는 게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이란 말을 시에서 유난히 중시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화자의 성품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란 성품대로 쓴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시란 흔히 자신을 쓰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하지요

 

그래서 운율성이랄지 표상성이랄지 그런 언어적 기능은 차지하고라도  단순히 내 감정에 겨워서만 써도 외연(外延: 전체를 보는 것,

가령 동물이라고 할 때 소, 말 돼지를 아울러 말하듯, )이나 내포(內包: 배가 물 위에서 운반을 위해 만들어진 용기)의 함축과 지칭의 형식을 이루어야 온전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단순한 시자심지발이 아니라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시를 시답게 쓸 수 있을 것인가,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시다운 시, 생명력 있는 시, 좋은 시,를 쓴다는 일은 쉽지 않지요..

자신만 만족해서는 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공감하는 시가 우선 좋은 시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하고 감정에만 이입하여 완성되지 않은 시, 메시지가 없는 시라면 공감은커녕 어설퍼서 자칫 읽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읽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듬고 가꾸고 숙성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시를, 시를 쓰는 분들은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시를 읽고 났을 때, `아 이것이 정말 시다` 하고 감흥이 이는 시가 있는 반면에 어느 시는 밋밋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경우를 더러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시란 내적으로는 감흥을 일게 하고 외적으로는 등을 토닥이듯 마음을 토닥여주는 그런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공모 시 콩쿨대회에서 1등한 작품에 <사막>이란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오르탕스 블루`라는 사람인데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이따금 뒤로 걸었다.

자기 앞에 놓인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

 

하이쿠풍의 두 줄의 시입니다만 저도 이 시를 읽고 감동을 했습니다. 외로움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뒤로 걸었다는 것, 요즘 우리 시단에 미래파 시인들의 시가 너무 어려워서 소통을 하는데 힘든다는 말을 합니다만 이건 비틀어서 만든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더 아름답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시자 심지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지요.  

 

첫째는 뭐니뭐니해도  좋은 글감 찾기지요. 

주제를 설정하지 않고 시를 쓰려 한다면 그만큼 시가 막연해지지요.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지필묵이 준비하는 것은 반드시 설정한 대상이 있을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반드시 시를 쓰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갑작스럽게 애틋한 마음이 생겨 그것 끄적거리고 싶을 때 그러니까 준비 없이 시를 쓰게 될 때, 이것 또한 준비의 첫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이미저리가 곧 자신에게 주제를 요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에서는 주제를 바꾸어 詩題라고 해야겠습니다만  마음이 발했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는지, 동기부여가 무엇인지 주제에 대한 소재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시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두고 이미지를 통한 이중구조를 마음에 그려야 좋은 시가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한 쪽은 좀 더 사실적이여야 하고 다른 한 쪽은 더 감정적이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실과 허를 어떤 상황이든 특수한 관계로 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별 고민 없이 그저 추상적이거나 객관적인 느낌만으로 시를 풀어간다면

기왕의 사실조차도 진정성의 결여라고 비치기 때문에 시제의 의미를 스스로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산문시 같은 평서체 문장이라고 하드라도 품사의 선택과 문채에서 글의 가치가 드러나는 만큼 시를 쓰는 사람은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 점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기술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상관물을 그대로 열거하는 敍事와 시적 표현으로 쓰는 묘사(描寫)와는 차에 유의해야 하겠지요

 , 描寫, 이 본뜬다는 말, 가령 우리에게 마음의 풍경이 있다면 그것을 평서체로 적지 않고 감정이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

곧 느낌을 만들어내는 문장을 말하겠는데, 그래서 서정시는 묘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봄이 오면 고향집 담장 가에 살구꽃 피고, 앞 냇가에 버들치 뛰어 오른다.`  라고 썼을 때,

이 단순 서사는 산문의 한 구절일 뿐이지요. 그래서 어쩠다는 것인가, 반문했을 때 내 생각만 담았지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어서  `내 마음 지금도 그때와 같아 지그시 눈 감으면 꿈결인 듯 아른아른 가슴에 들어서는 고향집 풍경,`  

이렇게 서사에 대해 마음을 담는 구체성을 띠는 문장이 될 때 묘사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그래서 어쩠다는 것인가라는 이 의문으로부터 풀어내는 것이 시다운 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화자는 유년의 추억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있구나, 라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더욱이 좋은 시는 적절한 알레고리를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 문장으로 구조적 통일성을 이루어 리듬과 가락이 살아 있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자 심지발이란,

초심이 뼈대이기 때문에 시작 동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서정시를 쓰는 분들은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서 너무 불분명한 보조관념을 써서 본 관념을 흐트러뜨리곤 하는데

그것의 수사가 종종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봅니다.

아름다운 시를 쓰려다가 자충수에 빠지는 것이지요. 수식이란 잘못 쓰면 안 쓰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또한 설명이 많아서 알레고리조차 드러내고 마는 것이랄지 지나친 알레고리로 인하여 소통을 막는 시 등이 그렇지 않는가 싶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이란 뼈와 살이 교묘하게 잘 어우러진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겉으로 살이 많이 찐 사람을 멋있고 예쁘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뼈만 앙등하게 보이는 사람을 또 그렇게 부를 수 없듯이 시 또한 그렇기 때문에 적제적소의 품사의 사용법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언어의 뼈는 명사인데 문장을 이루면서 필요 이상의 부사나 접속사 형용사 그리고 계사 등 이런 품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뼈대를 약화시키는데 이점에 있어서는 세심한 유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필요한 말조차도 줄일 수 있으면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것이 좋은 시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그와의 추억이 그리울 때면/  경춘선 기차를 타고 /

대성리를 가끔 즐겨 찾곤 하는데/ 곧잘 그곳에 가면 북한강에서 흐르는 물이 /가슴께로 흘러들곤 한다.`  

 이렇게 글을 썼을 때,  여기서 불필요한 단어가 하나 있지요.  곧잘이란 부사입니다.

이 말은 첫 행의 때면 이나 가끔이란 말이 이미 한정하고 있지요. 이렇듯 단어의 중첩으로 인하여 글의 격이 떨어지는 경우가 품사의 남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시 한편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략함으로서 유혹한다는 것이지요.

주먹밥을 만들듯이 모닥모닥 내용을 뭉쳐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 같은 내용을 다 담으려하면 자칫 시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욕심은 오히려 해악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말을 써서 주제를 흐트러뜨리지 않아야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시가 의미를 통한 미메시스(mimesis : 模放)다보니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알레고리지요.

이 비유와 상징은 시상을 풀어가는 핍진성(逼進性)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 사랑이라면 시에서는 흔한 사랑이 아닌 매우 특별한 사랑만이 통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하는 세속적인 사랑으로서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통속에 불과하지요. 독자는 결코 그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둘째.  둘째는 수식을 아낄 것, 좋은 말은 진실을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다보면 꾸미기 위해서 미사여구를 삽입하려고 하지요.

그럴 때 적절성과 객관성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서가 융합되어 조화로운 말이 아닌 단지 언어로서 존재하는 말의 쓰임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수식은 차라리 구체적 언설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진부한 수식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장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흔하지 않은 말, 귀하다 못해 궁한 말,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창작은 궁핍한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궁핍을 가능하면 치열함으로 이끌고 가서 -쓰여지는 시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화자와 독자 간에 길이 통하게 되는 것이지요  

 

셋째.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미지의 해석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란 말인데,

이 말은 소동파가 왕유의 산거추명(山居秋暝)이란 시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한 말입니다만 시적 풍경 속에 이미지를 차용하는 일입니다.

실험정신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래서 낯설기를 하고 비틀기를 하는 것인데 너무 초월적인 형태는 읽는 사람에게

거리감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친밀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리듬과 시의 의미를 감추어 시 안에서 은근히 꿈틀거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시인은 평생 좋은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하지요,

이 말은 대향 김춘수 선생이 주창한 말인데 그렇기 위해서 끊임없는 습작으로 도모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독서를 일컬어 무애 양주동 선생은 박이정이며 정 이박이여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만 시 또한 이처럼 두 가지 다 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쓰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그일 밖에 대안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작정 쓰기만 해서 안 된다는 것이지요.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이며 목로주점의 저자 에밀졸라는 습작기에 쓴 종이가 자기 키를 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진주목걸이의 저자인 모파상이란 작가가 있지요

그의 어머니는 모파상을 소설가로 키우기 위해 습작시절에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라는 작가 밑에서 문학수업 을 받게 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서재 앞 계단을 오르내리며 날마다 심부름을 다니는데 어느 날 플로베르 가 모파상을 불러 그랬더랍니다.

 `모파상아 너 요 앞 계단이 몇 갠지 아니` 하고 물으니, 모파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왜 세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신발 이 닳도록 심부름을 하며 햇수로 오르내린 계단이지만 세지 않아 선뜻 대답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한 집에 살아 도 평생 며느리가 시어머니 이름 모른다는 말,

그래서 플로베르가 모파상에 게 정중히 이르기를 소설을 쓴다는 것은 관찰을 기술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해라 그랬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관찰의 부재이지요. 관찰,이 란 참으로 긴요한 말이지요. 곧 글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찰 없이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것이 글의 진실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만가지 생각을 이끌어 내서 좋은 글을 쓸 수는 있지요 관찰한 것들이라도 의심나는 어휘나 단어는 반드시 사전을 통해 확인하고 숙지하여 써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젊은 날에는 포켓용 국어사전이 작아서 큰 것을 사서 보았으면 좋겠는데

돈도 없고 해서 부리고 싶은 언어를 부리려 해도 사전을 통해 검증을 해야 하겠는데 사전이 없어

종로서적 같은데 가면 이희승 선생의 국어 대사전을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사전만 있으면 도움이 되겠 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사전을 구입을 했는데 얼마나 좋은지 그날은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문법도 어휘도 단어도 어긋나지 않고 오직 사전을 통해서 객관적인가를 생각할 때

시 또한 관찰을 통한 서사만이 튼튼한 시가 된다는 것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20세기 중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라 할 수 있는 츠바이스란 분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제백석이라고 하지요. 오창석과 더불어 청 말의 양 대산맥을 이룬 분이기에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계기는

구한말 묵죽으로 명 성을 떨친 해강 김규진 선생의 아들 청강 김영기 화백의 스승이기에 그렇습니다만 그분이 젊어서 서화를 공부를하다가

하도 힘들어서 스승에게 물었더 랍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있을까요.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대답을 했겠습니까,. 열심히 써라, 뭐 그런 말은 스승이라면 당연지사일테 고,

그러나 어떤 선생은 그렇겠지요 잔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스승의 대답은 왈, 몽당붓 이 쌓여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려우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그때 제백석은 깨달음을 얻 었 던 것이지요. 오랫동안 써서 모가 달아버린 몽당붓이 쌓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면 습작의 과정은 안 봐도 뻔한 일이지요.

추사 김정희가 말한 마천십연(磨千十硯)이란 말이나 이삼만이 마을 냇물에 붓을 빨아 동내 아낙 들 이 빨래를 할 수 없었다는 일화는

습작의 중요성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 가를 새삼 깨우쳐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이 쓰는 것처럼 비슷하게 쓰면 안 되겠지요.

비슷한 것 가짜라는 말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도 확고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문학이지만 또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쓰 는 똑 같은 그런 시는 심하게 말하면 말의 췌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에게 스승이나 선배들은 별의별 주문을 합니다.

낯설게 하라 비틀기를 해라 지적하고 주문하고 그럽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것은 으례적인 말이고 시에서는 분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의 절대어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 있는 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젊은 날 문학수업을 소설로 공부했습니다만

근대작가로부터 전후작가 60년대70년대작가군들의 작 품을 읽으면서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특 히 70년대 황석영으로부터 김주영 한수산 조선작 윤흥길 조세희 그런데 이분들의 소설작품을 열심히 읽다보면 작품의 지문 같은 게 보입니다.

작가만이 지닌 독특한 문장 구성법이지요, 그것이 문채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문구씨 의 소설은 어느 부분을 읽어도 이문구 특유 의 문법이 있는 거죠.

그래서 어 느 작가를 깊이 읽다보면 저자를 몰라도 문채를 보고 누구의 작품인가를 알 게 된다는 것이지요.

시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시만이 지닌 고유함 같은 것 이 시에 들어 박혀 그런 문채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수영 이 김수영의 시를 썼듯이 기형도가 기형도의 시를 썼듯이 자 기다운,

자기만 의시가 곧 품격 있는 시 독창적인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시 다운 시가 될 수 있지요.    

 

그럼 제 졸시 `그루터기`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루터기    

 

나무는 죽어서도 풍장을 치른다 /밑동이 잘린 채 뼛속 깊이 생의 이름을 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무라는 말로서 그 이름을 대신한다면 /

굳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까, /생을 움켜쥐고 수원지를 찾아 헤매던 뿌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땅속 깊이 박힌 채 몸의 중심부에서 /

여전히 무슨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나 아닐까, /베인 밑동은 깊은 고뇌에 들었다 /살아 잎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건만 /

수액을 나르던 등피는 잘려나가고 화살의 과녁처럼// 나이테만 동그마니 남았다 그 표적에 앉아 세월의 출구 쪽으로 귀를 연다/

 똑, 똑, 석회암 동굴에서 종유석을 키우는 물방울 소리 /오랜 세월 풍찬노숙으로 키운 얼마나 애써온 생인가, /생명을 지키던 가쁜 숨소리가/

전류를 머금은 코일처럼 찌릿찌릿 감겨온다 /생을 그리 내주고도 표정은 이처럼 담담할까, /누구나 삶의 단층을 들여다보면 /

그곳에 생이 지니고 온 지도가 혈류처럼 간직되어 있다 /더 굵게 더 광활하게, 그러니까 생은 /둥글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

나무 한그루 자라서 베어질 때까지 평생토록 /하늘을 향해 생명의 문장을 써온 것이 그 이유라면 /이제 몸의 가장 낮은 자리에 중심을 내려/

저렇게 나이테만 남기고 피안에 들었다 /나무가 생의 이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알레고리는 개관적 상관물에 대한 존재의 존엄하고 아름다운 모습를 사유해 본 글입니다.

들으셨다시피 이 글은 평서체의 문장입니다. 저는 베어진 나무 한 그루에 대해 제 방 식의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시는 관념성이 강하지만 관념성마저도 직관의 관념성이어야 하지요.

우주조차 도 감각을 통해서 도달하는, 예를 들어 허무라는 관념으로 쓰여지는 시가 있을 때

존재의 부재로부터 비쳐 주는 제반 사항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드러날 때 좋은 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시란 시제가 어떻든 경험 이 아니고서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 시를 계획하고 쓰기 위해서 일부러 산에 가서 나무의 그루터기를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그루터기를 생각할 수는 있지요. 그러 나 현장성을 담기 위해서 마음을 더 생경한 곳에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제에 가만히 앉아서는 마음먹은 시를 기대하기 어렵 다는 것이지 요.

시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몸을 움직여 사유의 현장에 다가가야 하는 것 이지요. 그렇게 함으로 자기 시에 대해 자긍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그가 자란 환경, 읽은 책, 만난 사람, 그리고 현재 의 정신적 조건 등 말하자면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축적한 경험의 총체가 감정 속에 용해되어 있기에.

그런 경험의 총체가 하나의 육체를 빌어 구체적 인격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정은 그 사람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반영하는 종합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시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기 때문에 

시는 그 감정 속에 용해된 우리의 인간적 조건 전부를 통해 사물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하여 그것을 표 현한 것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시는 사물과  세계를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조명하고 이해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80년대

고 고정희 시인과 더불어 우리 문단에 시의 형식을 깨뜨린 새로운 지평을 연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라는 시편 가운데,

`묵념 5분 27초,` 라는 시가 있어요. 내용은 글자 한 자 없지요? 백지 그대로입니다만,

어떤 말보다도 가만히 고 개 숙여 있을 때 묵념답다는 생각을 시인은 했을 것입니다.

말 한마디 단어 한 자 없는 시이기 때문에  이런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런 말은 콜롬부스 달걀 같다는 말이지요. 좋은 시라는 것은 이처럼 체험 속에 서 나오는 신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체험이라고 말하며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표면에 죽음조차도 두려움이 없이 파고들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합니다.

결국 릴케는 사랑을 체험하기라도 한 듯이 장미가시에 찔려 그것이 백혈병의 원원이 되어 죽었다고 하지요. 

지금 2010년도 우리시의 현주소는 흔히 시인 공화국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기에 시의 공화국이기도 하고요.

이 말은 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양적인 말이겠지요.

신체시 이후 우리 시의 역사가 100년이나 되었지만

언어감각은 유행하는 패션에도 못 미치는 안 읽히는 시라는 것이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아쉽습니다.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나만의 대상을 찾는 게 좋은 시를 쓰는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여기서  고려시대 대문장가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의 [論詩]라는 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作詩尤所難 시 짓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우니/ 語意得雙美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含蓄意苟深 함축된 뜻이 진실로 깊어야/ 咀嚼味愈粹 음미할수록 맛이 더욱 알차네. / 意立語不圓 뜻이 서도 말이 원만하지 못하면/ 澁莫行其意 난삽하여 뜻을 전하기 어렵다네./ 就中所可後 그 중 뒤로 미뤄도 될 것은/ 雕刻華艶耳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라네. / 華艶豈必排 화려한 문장을 굳이 배제하겠는가마는/ 頗亦費精思 모름지기 정신을 쏟아야 마땅하네./ 攬華遺其實 꽃만 붙잡고 그 열매를 버린다면/ 所以失詩旨 시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되네./ 邇來作者輩 요즈음의 글 짓는 무리들은/ 不思風雅義 풍아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外飾假丹靑 겉꾸미기로 미사여구 늘어놓아/ 求中一時嗜 한때의 기호에만 맞추려 드네./ 意本得於天 뜻이란 본래 하늘에서 얻느니 /難可率爾致 쉽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네./ 自?得之難 스스로 어려운 줄 알고 있기에/ 因之事綺靡 그리하여 더욱 화려하게만 하여/ 以此眩諸人 이것으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켜/ 欲掩意所? 깊은 뜻 없는 것을 엄폐하려 하네./ 此俗已成 이런 풍속이 점차 일반화되어/ 斯文垂墮之 문화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李杜不復生 이백 두보가 다시 나지 않으니/ 誰與辨眞僞 누구와 더불어 참과 거짓 구별하랴./ 我欲築頹基 나는 무너진 터전을 다시 쌓으려 하나/ 無人助一?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이 없네/ 誦詩三百篇 시 삼백 편을 외운다 해도/ 何處補諷刺 어느 곳을 풍자하여 보충하겠는가./ 自行亦云可 스스로 행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孤唱人必戱 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을.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저는 마음에 비친 풍경을 그리는 것이라 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가 어떤 법칙에 의해서 쓰여진다면 그것은 각본을 갖는 것이기에 마음에 깃든 풍경을 그리는 게 아니라

바꿔 말하면 텍스트가 따로 있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마음이 발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사실과 이미지를 통하여 마음의 내부를 그리기 때문에

자율성이 문학의 어느 장르보다 두드러지는 가장 문학적인 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시를 통해서 문학의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치 있는 표현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그로 인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 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시경 삼 백편 어느 하나도 사 함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思無邪) 시는 보편적 가치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감정이라도 고도의 억제력 있는 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어떤 시를 쓰시던지 시대와 현실과 아름다움이 가슴 에서 용해되어 돌출하는 생명 있는 시를 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펌 서정문학에서: 바로가기 http://cafe454.daum.net/_c21_/home?grpid=1BTn3)

 

 

 

 

 

 

출처 :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 그리움!
글쓴이 : 비Rai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