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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간의 갈등 - 을사사화

은빛사연 2015. 10. 26. 19:41

앞서 말했듯이, 4대 사화의 성격은 서로 달랐다. 무오사화는 국왕과 일부 대신들이 김종직 일파를 명분으로 삼사에게 경고한 사건이었고, 갑자사화는 국왕이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극한적 폭력이었다. 그리고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급진적 개혁정치를 정지시키기 위한 국왕과 대신들의 전격적인 숙청이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丁未)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분쟁의 실마리


세상의 경쟁과 갈등은 대부분 탐스러운 가치의 획득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그 가치는 주로 어떤 직위나 권력, 재력 등일 것이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대한 가치는 왕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근대의 수많은 정치적 투쟁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주요한 선거 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현재와 달리, 왕조 국가의 왕위는 적장자가 세습했기 때문에 분쟁의 가능성은 비교적 낮았다. 그러나 그런 낮은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예외적인 사례가 드물지 않았고, 인권과 법률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했던 당시의 특성상 그런 국면에는 상당한 인명 손실이 뒤따랐다.

 

그런 예외적인 사례는 주로 적장자가 없거나 복수(複數)이거나 강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왕자가 있는 경우였다. 을사사화의 배경이 된 중종 후반의 이례적 상황은 정통성을 가진 왕위 계승의 후보자가 인종(재위 1544~1545)과 명종(재위 1546~1567) 두 사람이었고, 먼저 즉위한 인종이 너무 일찍 붕어했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정비가 세 명이었다. 첫 정비는 단경(端敬)왕후 신씨(愼氏, 1487∼1557. 본관 거창)인데, 아버지가 연산군 때의 주요한 대신인 신수근(愼守勤)이었기 때문에 반정 직후 폐위되었다. 첫 계비 장경(章敬)왕후 윤씨(尹氏, 1491~1515, 윤여필의 딸. 본관 파평)는 1515년(중종 10년) 인종을 낳았지만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2년 뒤 두 번째 계비를 맞았는데(1517, 중종 12년), 그녀가 유명한 문정(文定)왕후(1501~1561, 윤지임의 딸. 본관 파평)다. 문정왕후는 1534년(종종 29년)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의 명종)을 출산했다. 이로써 왕실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복수의 유력한 후보자가 존재하는 이례적 상황이 찾아왔다.

 

순리대로라면 이런 경우 왕통은 인종과 그 후사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인종의 모후는 세상을 떠났고, 당시의 정비는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와 그 가문)가 자신이 낳은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시도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도가 가시화되면서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세력은 하나뿐인 왕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전개했다.

 

 

본격화되는 갈등


그런 갈등은 중종 후반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 첫 희생자는 당시 ‘권신(權臣)’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행사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였다. 그는 1537년(중종 33년)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문정왕후의 폐위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두 세력의 분화와 대립은 중종이 붕어하기 1년 전 더욱 구체화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2월 대사간 구수담(具壽聃)은 “지금 윤임과 윤원형이 각각 대윤과 소윤이라는 당파를 세웠다는 풍문이 있다”고 아룄다.

 

널리 알듯이 윤임(尹任, 1487~1545)과 윤원형(尹元衡, ?~1565)은 각각 장경왕후와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인종과 명종의 외숙이었다. 윤임은 무과 출신이었고 경주부윤 등을 거치는 등 상대적으로 경력이 떨어졌지만, 김안로와 연합해 세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윤원형은 문과에 급제해(1533) 벼슬을 시작했지만 김안로에게 파직·유배되었다가(1537) 그가 숙청되자 풀려나 지평·응교·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윤과 소윤의 충돌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인종의 즉위와 갑작스러운 붕어


그때까지 가장 긴 기간인 39년의 치세를 마치고 중종이 붕어하자 인종이 즉위했다(1544년 11월 20일). 그러나 29세의 젊은 국왕에게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다.

 

즉위 직후 의원은 국왕의 맥박이 약하고 낯빛이 수척하다는 진찰 소견을 밝혔다(1545년 윤1월 9일). 그 뒤 눈이 붓고 극도로 여윈(4월 27일) 국왕은 즉위한 지 9개월도 안되어 속절없이 붕어했다(7월 1일). 험난한 권력 투쟁 끝에 인종의 즉위로 기선을 잡았던 대윤은 순식간에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명종의 즉위와 사화의 시작

 

왕위는 11세의 명종에게 승계되었지만(1545년 7월 6일 즉위) 국왕의 어린 나이 때문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능력으로 그동안의 여러 위기를 헤쳐온 왕후와 소윤은 즉각 보복을 전개했다.

 

명종의 치세가 시작된 지 한 달 반 만에 소윤의 주요 인물인 병조판서 이기(李芑)·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공조판서 허자(許磁)·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등은 대윤을 탄핵했다. 윤임은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자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명종 대신 다른 인물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거기에 좌의정 유관(柳灌)과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도 협력했다는 혐의였다.

 

이언적(李彦迪)·권벌(權橃) 등은 밀지에 따라 탄핵이 이뤄졌다는 문제를 지적했지만, 왕후와 소윤의 강경한 태도에 부딪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단 윤임은 절도에 안치되고 유관과 유인숙은 파직되었지만(8월 22일) 나흘 뒤 모두 사사되고 말았다(8월 26일). 인종이 붕어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강릉은 조선 13대 국왕 명종과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으로 왕과 왕비가 한 구역에 안장된 쌍릉이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소재. 사적 제201호.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사화의 확대

사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욱 확대되었다. 그 계기는 경기도 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의 고변이었다. 9월 1일 김명윤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와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도 윤임의 역모를 알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계림군은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桂城君)의 양자로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의 외손이자 윤임의 조카였고, 봉성군은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아들이었다.

 

이에 윤임과 계림군의 친인척과 지인·종들이 국문을 받았고, 결국 윤임의 사위 이덕응(李德應)의 결정적인 진술이 나왔다. 사실을 자백하면 살려주겠다는 소윤의 회유를 받은 이덕응은 윤임이 봉성군에게 인종을 모시게 했다가 국왕이 승하하면 바로 대위를 물려받게 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고 밝혔다.

 

피화자는 확대되었다. 계림군·윤임·유관·유인숙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고, 정욱(鄭郁)·나식(羅湜) 같은 문신들이 유배되었다. 피화자의 아내와 딸들은 노비로 전락했고, 형제·숙부·조카 등은 유배되었다. 도망갔던 계림군도 붙들려 처형되었고, 자백했던 이덕응도 약속과 달리 죽음을 당했다. 을사년의 사화는 28명의 위사(衛社)공신을 책봉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9월 15일).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을사사화에서 대신이나 삼사의 피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즉 그것은 기존의 사화와 또 다른 양상을 가진 사건이었던 것이다. 좀더 큰 규모의 옥사는 오히려 그 뒤에 일어났다.

 

 

사화의 재발- 정미사화


그것은 유명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을 매개로 한 정미사화였다. 1547년(명종 2년) 9월 18일 부제학 정언각(鄭彦慤) 등은 경기도 양재역의 벽에서 익명서(匿名書)를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엄청난 내용이 씌어 있었다.

 

[명종실록]의 사평(史評)대로 익명서는 그 진위와 파급력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부자(父子)끼리도 열어보지 않고 없애버리는 문서였다(1547년 윤9월 18일). 그러므로 정언각이 이런 문서를 조정에 알렸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었다.

 

사건이 확대되는 것은 당연했다. 주목할 사항은 수사가 그 문서의 진위나 작성자의 색출 같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와 주요 대신들은 이전의 역적을 엄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런 즉각적인 판단은 옥사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이기·윤원형 등의 주도에 따라 윤임의 인척인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은 사사되고, 권벌·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을사사화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했던 주요 인물은 유배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소요가 더 있었지만, 대윤과 소윤의 충돌로 빚어진 사화는 일단락되었다. 그 뒤 문정왕후는 6년 동안 더 수렴청정을 지속했고(1553년(명종 8년) 7월 12일 청정을 끝냄),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은 영의정까지 오르면서(1563년 1월 17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일반적으로 을사사화에서 1백 여 명의 신하가 피화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구체적인 규모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은 이 사화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조선 전기 사화의 의미


지금까지 조선 전기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인 4대 사화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거기서 얻은 핵심적인 결론은 우선, 이 글의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그 사건들은 ‘사화’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개별적 성격은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기묘사화까지 세 사화를 관통한 주제는 삼사였다. 갑자사화는 조금 달랐지만, 갈등과 충돌은 국법에 보장된 삼사의 기능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과 범위를 둘러싸고 촉발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할 측면은 사화의 발발과 전개에는 국왕(을사사화에서는 대리청정한 문정왕후)이 중요한 영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무오·갑자사화에서 연산군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기묘·을사사화에서도 중종의 밀지(密旨)와 문정왕후의 처결은 사건을 주도한 핵심적 동력이었다. 왕정의 원리상 당연하지만 그동안 다소 간과되어 온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정치사는 물론 ‘훈구·사림론’을 검토하는데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생각된다.

 

사화의 주요한 의미는 제도가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늘 발생하는 갈등과 진통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사화의 시련을 거치면서 삼사는 그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했고, 국왕·대신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필수적 관서로 자리잡았다. 그 뒤 삼사는 그 기능이 변질되면서 당쟁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이런 변화는 조선 전기 정치사의 중요한 발전이 분명했다. 정치사적 측면에서 사화는 조선 전기를 마무리하고 중기로 넘어가는 일련의 고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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