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했듯이, 4대 사화의 성격은 서로 달랐다. 무오사화는 국왕과 일부 대신들이 김종직 일파를 명분으로 삼사에게 경고한 사건이었고, 갑자사화는 국왕이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극한적 폭력이었다. 그리고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의 급진적 개혁정치를 정지시키기 위한 국왕과 대신들의 전격적인 숙청이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丁未)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분쟁의 실마리
주요한 선거 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현재와 달리, 왕조 국가의 왕위는 적장자가 세습했기 때문에 분쟁의 가능성은 비교적 낮았다. 그러나 그런 낮은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예외적인 사례가 드물지 않았고, 인권과 법률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했던 당시의 특성상 그런 국면에는 상당한 인명 손실이 뒤따랐다.
그런 예외적인 사례는 주로 적장자가 없거나 복수(複數)이거나 강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왕자가 있는 경우였다. 을사사화의 배경이 된 중종 후반의 이례적 상황은 정통성을 가진 왕위 계승의 후보자가 인종(재위 1544~1545)과 명종(재위 1546~1567) 두 사람이었고, 먼저 즉위한 인종이 너무 일찍 붕어했다는 것이었다.
중종은 정비가 세 명이었다. 첫 정비는 단경(端敬)왕후 신씨(愼氏, 1487∼1557. 본관 거창)인데, 아버지가 연산군 때의 주요한 대신인 신수근(愼守勤)이었기 때문에 반정 직후 폐위되었다. 첫 계비 장경(章敬)왕후 윤씨(尹氏, 1491~1515, 윤여필의 딸. 본관 파평)는 1515년(중종 10년) 인종을 낳았지만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2년 뒤 두 번째 계비를 맞았는데(1517, 중종 12년), 그녀가 유명한 문정(文定)왕후(1501~1561, 윤지임의 딸. 본관 파평)다. 문정왕후는 1534년(종종 29년)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의 명종)을 출산했다. 이로써 왕실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복수의 유력한 후보자가 존재하는 이례적 상황이 찾아왔다.
순리대로라면 이런 경우 왕통은 인종과 그 후사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인종의 모후는 세상을 떠났고, 당시의 정비는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와 그 가문)가 자신이 낳은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시도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도가 가시화되면서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세력은 하나뿐인 왕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전개했다.
본격화되는 갈등
두 세력의 분화와 대립은 중종이 붕어하기 1년 전 더욱 구체화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2월 대사간 구수담(具壽聃)은 “지금 윤임과 윤원형이 각각 대윤과 소윤이라는 당파를 세웠다는 풍문이 있다”고 아룄다.
널리 알듯이 윤임(尹任, 1487~1545)과 윤원형(尹元衡, ?~1565)은 각각 장경왕후와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인종과 명종의 외숙이었다. 윤임은 무과 출신이었고 경주부윤 등을 거치는 등 상대적으로 경력이 떨어졌지만, 김안로와 연합해 세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윤원형은 문과에 급제해(1533) 벼슬을 시작했지만 김안로에게 파직·유배되었다가(1537) 그가 숙청되자 풀려나 지평·응교·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윤과 소윤의 충돌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인종의 즉위와 갑작스러운 붕어
즉위 직후 의원은 국왕의 맥박이 약하고 낯빛이 수척하다는 진찰 소견을 밝혔다(1545년 윤1월 9일). 그 뒤 눈이 붓고 극도로 여윈(4월 27일) 국왕은 즉위한 지 9개월도 안되어 속절없이 붕어했다(7월 1일). 험난한 권력 투쟁 끝에 인종의 즉위로 기선을 잡았던 대윤은 순식간에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
명종의 즉위와 사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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