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
출생 : 1441년(세종 23)
사망 : 1468년(예종 즉위년)
경력 : 공조판서, 병조판서
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대의 인물로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무과에 급제했던 기린아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그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A>이 일어났을 때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여 출셋길에 올랐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 말년에 남이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구성군 이준의 뒤를 이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신진세력의 약진을 고까워하던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의 견제를 받았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한명회의 친구였던 장인 권남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으므로 수렁에 빠진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백성들은 남이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채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 그의 운명을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시키기도 했다. 무속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까지 했다. 그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9명의 충무공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남이장군 사당제
귀신도 두려워 도망치다.
남이(南怡)는 본관이 의령으로 144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이다. 아버지 남빈의 벼슬은 군수에 그쳤지만 장인이 세조의 총신이었던 권남이었다. 그는 17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 전기에 문무과를 불문하고 과거 급제자의 평균 나이가 30세 전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히 빠른 등과였다.
남이의 이른 약진은 뛰어난 재주 외에도 태종의 외증손이라는 점과 당대 권력자 중에 한 사람인 권남의
사위라는 점이 조기 출세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제6권 〈예종조 고사본말〉에는 그가 어떻게 해서 권남의
사위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두 가지 전설이 실려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남이가 젊었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위에 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남이는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가는 대로 따라 갔더니, 그 종은 어떤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물었더니, 주인 집 작은 낭자가 별안간에 죽었다고 했다.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말하자, 그 집에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허락했다. 남이가 문에 들어가 보니 분 바른 귀신이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다가 남이를 보는 즉시 달아났다. 그러자 낭자는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자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남이가 ‘어린 종이 가져온 상자 속에는 무슨 물건이 있었더냐?’ 하고 물었더니, ‘홍시가 있었는데 낭자가 이 감을 먼저 먹다가 숨이 막혀서 넘어졌던 것입니다.’ 했다. 그가 본 대로 상세히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했더니 낭자가 살아났다. 이 낭자는 곧 좌의정 권남의 넷째 딸인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좋은 날을 가려 혼인을 정했다고
한다.” 《국조기사》 “일찍이 권남에게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했다. 권남이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점쟁이는 ‘이 분은 반드시 나이 젊어서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합니다.’ 했다. 자기 딸의 수명은 또 보게 했더니, ‘이분의 수명은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합니다.’ 했다. 권람은 그 말에 따랐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극진히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남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 《부계기문》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이 장군은 귀신조차 무서워할 정도로 용력과 기상이 대단한 인물이다. 조선 건국 초기였던 그 시대는 역성혁명이나 왕권 탈취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궁궐이나 민간에 넘쳐흘렀을 것이다. 그런 음산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남자다운 강인함과 흔들리지 않는 담력이다. 억울하게 죽은 남이 장군이 무속에서 사악한 귀신을 쫓는 신령으로 모셔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문관이 조정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평소에 무관은 늘 찬밥
신세로 문관의 뒷바라지나 하는 존재였다. 전쟁이나 내란이 벌어지면 군대의 최고지휘관 자리는 문관의 차지였다. 개국공신의 후예이자 공주의 아들로서 여러 모로 출세의 조건을 구비했던 그가 천대받는 무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사료에 따르면 남이 자신도 무사들을 멸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거친 성격이나 뛰어난 무예가 그를 천생 무관으로
만들었다. 언젠가 명나라의 사신 강옥이 그의 활 쏘는 모습을 보고 세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좋은 장수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니 전하께서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실린 남이장군의 모습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남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가 27세 때인 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이었다.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했던 풍운아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그는 특히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는 북방을 통제하기
위해 현지 출신의 수령을 대폭 줄이고 중앙에서 직접 관원을 파견했다. 아울러 호패법을 강화하여 변방 백성들의 이주를 제한했다. 함길도 길주 출신의 양반으로 회령 부사를 역임한 이시애는 이런 세조의 차별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현지 양반과 상인 계급을 포섭하고 “하삼도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 충청도 군병이 배를 타고 경성·후라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호도한 다음 1467년 5월 길주에 온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인 다음 아우 이시합, 매부 이명효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길주목사 설정신, 부령부사 김익수 등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모조리 죽인 다음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신숙주 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그로 인해 세조에게 총애 받던 한명회와
신숙주가 하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 와중에 반란군은 단천과 북청을 제압하고 함흥을 공격하여 관찰사 신면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까지 생포하며
기세를 올렸다.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3만 명의 토벌군을 파견하면서 촉망받는 종친 구성군 이준을 4도 병마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았다. 이후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철원까지 진격했지만 관군의
효과적인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북쪽으로 밀려났다. 7월 말경 북청에서 5만 명의 관군과 이시애의 동생 이시합이 지휘하는 반란군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이때 남이는 말을 타고 적진을 휩쓸면서 반란군을 짚단처럼 베어 넘겼다. 전투 도중 4,5발의 화살을 맞았지만 개의치 않고 칼을 휘둘렀다.
반란군이 밀리자 이시애가 급히 1만 명을 증원하여 공격했지만 기울어진 전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반란군은 궤멸되자 이시애는 길주로 도망쳤다가 8월 12일 영동역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남이는
이 전투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정4품 행호군(行護軍)에 임명되었다. 전쟁 도중에 장군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난이 진압된 뒤에는 적개 1등 공신과 의산군(宜山君)에 책봉되었다.
훈구대신과의 신진세력의 갈등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변에 건주위 여진족이 출몰하자 남이는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이
지휘하는 정벌군에 우상대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그는 주장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파저강 인근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지도자 이만주와 아들 고납합을 죽이는 대공을 세웠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승세에 도취한 남이는 전장에서 회군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한시를 지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하지만 그 자만이 훗날 자신을 찌르는 칼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훗날 유자광이 그의 역모를
고변할 때 이 한시의 3행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의 평평할 평(平) 자를 얻을 득(得) 자로 고쳐 모함했다고 한다.
《지봉유설》에 이 한시를 실으면서 ‘그 말뜻이 발호(跋扈)하여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가 어려웠다.’라고 평했다. ‘발호’란 큰 물고기가 통발을 뛰어넘는다는 뜻이니 아랫사람이 권력을 휘둘러 윗사람을 벌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때부터 남이가 반역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진족을 평정한 뒤 남이는 공조판서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한 달 뒤에는 구성군의 뒤를
이어 병조 판서에 발탁되었다. 당시 세조는 남이에게 “이미 공신에 책봉되었고 큰 전공을 세웠으니 자만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이는 세조가 친림한 연회에서 술에 취한 채 “요즘 주상께서 구성군 이준을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등 자만심에
가득했다. 그 시절 남이가 객관적으로 뛰어난 인물임에는 분명했지만 그가 질투할 정도로 앞서가던 인물이 바로 구성군
이준이었다. 남이와 동갑나기였던 구성군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 이구의 아들로 세조의 신임을 받아 이시애의 반란 당시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고,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직위를 남이에게 넘긴 다음 1468년 7월, 28세의 나이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는 종친의 정사 참여를 금지한 국법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조치로 항상 그의 뒤를 따라야 했던 남이의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그를 뛰어넘어 정계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남이의 비극적인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훗날 구성군 이준 역시 정인지의 모함으로 최세호와 함께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고, 1479년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앞서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세조 말기 조정은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등의 훈구대신과 구성군 이준, 남이 등이 신진세력이 세력을 다투는 형국이었다. 한데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저울추는 훈구대신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젊은 예종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초고속
출셋길을 걷고 있던 구성군 이준이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자광의 고변
1468년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조회에서 형조 판서 강희맹과 중추부 지사 한계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이는 신진세력을 견제하려는 훈구세력의 노골적인 공세였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혈기방장했던 남이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군신 모두가 근심에 잠겨있던 10월 24일, 심야에 병조 참지 유자광이 승지 이극증과 한계순에게 남이의 역모를 고변했다. 예종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유자광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러자 유자광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남이는 ‘세조께서는 우리를 아들처럼 대접했지만 그 분이 승하하니 조정의 인심이
바뀌었다. 김국광이나 노사신 같은 간신들이 장난을 하면 우리는 개죽음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남이가 우리 집에 와서 ‘혜성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빛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큰 병란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주상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는 때를 기다려 거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종은 즉시 대궐의 경계를 강화한 다음 사복장 거평군 이복에게 남이를 잡아오게 했다. 이복이 위사 1백여 명을 이끌고 남이의 집으로 달려가 남이와 첩 탁문아를 체포했다. 그날 한밤중에 수강궁 후원 별전에서 여러 종친과 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예종이 직접 남이를 심문했다. 그때 남이는 혜성과 관련된 내용은 인정했지만 역모는 절대 획책하지 않았다고 버텼다. 남이의 첩 탁문아와 남치빈, 이지정 등을 차례로 심문했지만 역모의 정황이 드러나지 않았다. 상황이 미궁에 빠져들자 노회한 한명회가 남이의 노비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게
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여종 막가가 국문장에 있던 영의정 강순을 지목하며 그가 남이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자백했다. 깜짝 놀란 강순은 우연히 한두 차례 들렀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런데 전 판관 이수붕이 여진 출신의 겸사복 문효량과 남이가 함께 일을 도모했다고 고변했다.
국문장에 끌려온 문효량은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마침내 역모를 시인하고야 말았다.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어린 임금을 끼고 권세를 부리니 큰일이다. 너는 해외 사람으로 겸사복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강순도 이 일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효량은 남이의 구체적인 계획까지 토설했다. 예종이 산릉에 참배할 때를 기다려 한명회를 없애고,
또 영순군과 구성군까지 죽인 다음 주상을 해치고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이었다. 문효량의 자백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남이는 드디어 역모를 시인하면서 강순과 함께 도모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로 인해 이 사건은 남이 개인의 역모가 아니라 ‘남이와 강순의 역모’로 규정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남이섬길 1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의 가묘(사진). 또한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는 그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묘가 있다
남이와 강순의 역모
당시 남이가 자신의 역모 혐의에 강순을 저승사자처럼 물고 늘어진 것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인다. 그는 왜 최악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자백을 했을까? 진정으로 모의를 함께 한 사이라면 서로 구원하고 감춰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인조 대의 공신 김시양의 수필집 《부계기문》에 묘사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남이가 국문을 당할 때 강순이 영의정의 직책으로서 들어와 참관했다. 그를 보고 남이는
예종에게 말했다. “강순도 이 모의에 간여했습니다.” 깜짝 놀란 강순이 예종에게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강변했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밝으신 임금을 만나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무엇을 구하려고 남이의 역모에 간여했겠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이가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 그의 거짓말을 믿고 죄를 면케 한다면 어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마음을 고쳐먹고 형리를 시켜 강순에게도 국문을 가하게 했다. 강순이 나이 80세였으므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남이야, 네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나를 무함하느냐?” 이에 남이가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원통한 것은 나와
네가 매한가지다. 네가 영의정이 되어 나의 원통한 것을 알고도 말 한 마디 없이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자 강순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남이가 끝까지 강순이 역모의 동조자라고 주장한 것은 요직에 있던 그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알면서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속 좁은 임금이 병조 판서 허종까지 연루시키려 하자 종사를 위해 그의 결백을 보증해 주었다. 그 내용은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이 편찬한 《기재잡기》에 실려 있다
이때 남이가 심한 형벌로 다리뼈가 부러지자 강순과 역모를 했다고 자백했다. 강순이 거세게
항의하자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자복하지 않은 것은 훗날 공을 세울 것을 바랐기 때문인데 지금 다리뼈가 부러져 쓸모없는 병신이 되었으니 살아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나 같은 젊은이도 죽는 것이 아깝지 않은데 머리털이 허옇게 센 늙은 놈은 죽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고의로 너를 끌어댄 것이다.” 그때 임금이 물었다. “병조 판서 허종도 역모를 아느냐?” 입시하고 있던 허종이 두려움에 떨며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남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BR>“허종은 충신이라 아무 것도 모릅니다. 원컨대 이 사람은 쓰시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형을 당할 때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젊은 애와 잘 지냈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나.”
씁쓸한 참화의 뒤풀이 남이의 역모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순, 남이,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이 저자에서 능지처참당하고 7일 동안 효수되었다. 아울러 남이의 어머니는 국상 때 고기를 먹었고, 아들이
대역죄인이며,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 즉 모자간에 상피 붙었다는 치욕적인 죄목으로 저자에서 몸이 찢기고 사흘 동안 효수되었다. 남이의 조모인 정선공주의 노비들은 내수사에 전부 회수되었고, 남이의 집은 고변자 유자광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남이는 장인 권남의 친구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의 위세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권남의 자식들은 누이가 일찍 죽은 탓에 남이와 교류가 끊어졌으므로 멸문지화를 면했다. 1469년(예종 1년) 1월, 예종은 신숙주 등 36명을 익대 공신으로 봉하고 역신들의 처첩과 자녀를 노비로 하사했다. 그리하여 강순의 아내 중비와 민서의 첩의 딸 말금은 유자광에게, 강순의 첩 월비와 변자의 첩의 딸 변소앙가는 신숙주에게, 남이의 딸 남구을금과 홍형생의 첩 약비는 한명회에게, 남이의 첩 탁문아는 신운에게, 최원의 아내 권비는 구성군 이준에게, 문효량의 아내 덕이는 박지번에게, 이철주의 아내 효도는 정인지에게, 조영달의 아내 중이가는 정창손에게 내려주었다. 당시 신운은 남이의 애첩 탁문아가 궁궐의 연회에서 정재를 공연한 적이 있으므로 감히 집안의 노비로 부릴
수 없다고 주청하자 진해의 관비로 보냈다. 그렇듯 남이와 강순의 역모로 인하여 관련자들의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가산과 노비는 고스란히 공신들의 몫이 되었다. 남이는 1818년(순조 18년)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도 그때 내려진 것이다. 350여 년 동안 저승에서도 다투었을 두 사람의 동행은 편안했을까?
출처 : [Daum백과] 남이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는 조선 세조 때의 무신 남이 장군의 유택.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남이 장군과 부인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이상은 발췌글)
내가사는 남양주(진건읍 사릉)에는 떡배산이라는 해발 약150m가량의 작은 산이 있다.
정상에 떡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어렸을적 친구들과 가끔씩 올라가서 놀다 내려오곤 했던 추억어린 산이다.
크게 두개로 이루어진 이곳 바위에 설화처럼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남이장군과 관련된 설화이다.
내용은
이곳 떡바위에 남이장군이 말을타고 올라 무예연습을 하곤 했는데
남쪽 바위에서 북쪽 바위로 뛰어건너며 선명한 말발굽 자국과 칼자국을 남겼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바위에는 전설같은 이야기에 부합되는 움푹패인 말발굽 자국과 칼로 벤것같은 자국이 존재한다.
게다가 칼자국에는 피처럼 붉은 이끼 자국까지 더해져 어렸을적 동심을 자극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입에서입으로 구전되어 오는 내용이라 명확한 근거도 없고,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지만 어렸을적 들었던 기억이 분명하여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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