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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수필의 맛과 멋내기

은빛사연 2009. 10. 28. 14:52

기행수필의 맛과 멋내기



최원현


nulsaem@hanmail.net


 

  1. 들어가며

 


 최근 들어 여행이 보편화 되면서 눈에 띄게 많아진 게 바로 여행에 관한 글들인 것 같다. 그것들은 일반 잡지 뿐 아니라 여느 문학지에서도 쉽게 만나게 되며 더러는 장편수필의 유형에 포함 시키거나 연작 형태로 연재를 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수필형태처럼 다가가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이란 이름으로 발표되는 수많은 여행기들을 보며 가만히 앉아서도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감사함도 있지만 아이들의 수학여행기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것도 있어 문학성에 대해 생각케 한다. 


 여행이야말로 가장 다양한 글감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새롭게 보고 만난 것들에 대한 감격과 충격은 내면 깊이 잠들어 있던 문학의 샘을 깨우기도 하니 글을 쓰는 사람에겐 참으로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문학화 하는가에 대한 부담은 다른 글감보다 훨씬 더 클 것 같다. 특히 여행이 일반화 되어버린 요즘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도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자칫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진부하고 식상한 내용의 글들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내 일, 내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에서 받는 신기함, 호기심 등은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맛이다. 그런데 현대엔 너무 많은 여행, 아니 너무 쉽게 떠날 수 있게 된 여행이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게 없게 되었고, 내가 갈 정도면 이미 남도 갔을 것이고, 또 남이 가서 본 것을 써놓은 글을 읽기도 전에 벌써 내가 그곳에 가 있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가서 보는 것보다도 더 실감나게, 가 보았음에도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써놓은 글이어야 그나마 읽고 싶기도 하고 또 읽어서도 감동을 받게 될 것이란 말이다. 직접 가서 본 것보다도 더 실감나게 쓰는 글, 실로 글 쓰는 이의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신선한 충동에 의해 씌어진 글이라지만 내가 받은 신선함과 충동 이상으로 독자에게도 같이 느껴질 수 있을지 의문이고, 그렇지 못 하다면 그건 생명력 곧 공감을 얻는 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는 여행을 웰빙의 출발로 생각한다. 자연히 그런 내용의 글이나 자료도 넘쳐난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시대적 분위기를 잘 어우르며 어떻게 남보다 더 새롭게 보고 특별하게 갈무리 하여 기행수필로 문학화 하느냐는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2. 기행문학, 기행수필


  수필이 자기의 체험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발효․여과․농축한 문학이라면 기행수필 또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체험)을 소재로 하여 주제감있게 재구성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수필문학은 기행문학으로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행문학이 수필문학의 선도자인 셈이다.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김진형(金鎭衡)의 《북천가(北遷歌)》 홍순학의 〈연행가〉등은 기행가사로 기행문학이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한문으로 된 기행문이며,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은  근대 최초의 기행문이다. 최남선(崔南善)의《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는 좋은 기행수필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여행의 영역이 넓어진 현대 들어 더 많은 기행문학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같이 여행을 하고서 쓴 글인데도 한 글은 그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썼구나 로만 생각되는데 다른 글은 이상하게 가슴 가득 감동이 몰려온다. 바로 예술성 곧 문학성의 차이다. 단순한 여정의 기록이 아니라 주제와 소재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조화의 얼개를 가지면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예술적 감흥․동감․공감력으로 전달되어 올 때 문학성(감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행수필과 기행문은 무엇이 다른가.


  기행문이나 기행수필이 다 같이 여행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쓴 것이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다만 기행문은 상황 또는 사실․사건의 기록에 좀 더 충실한 편이고, 기행수필은 거기서 한 발 나아가 그걸 문학화 한다는 차이이다. 그렇다고 기행문은 문학이 아니냐 하면 그렇지 않다. 좋은 기행문이 좋은 기행수필일 수 있다.


  따라서 기행문학은 가장 자연친화적 문학으로 서정수필과 다름없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공감력이 있을 때 좋은 글이라 할 수 있겠다. 기행문은 오감을 동원하여 쓰는 글이다.


 

3. 기행수필의 형태와 종류


  기행수필은 여러 가지 형태로 씌어진다. 일기문이나 편지글처럼 씌어지기도 하며 내용 중엔 시나 전설, 유래 등을 넣기도 한다. 말하자면 여행에서 얻은 것을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형태로 쓰는 것이다.


  옛 기행문들을 보면 특별한 상황에서 씌어진 것들로 내용상 유람기행(遊覽紀行.또는 관유(觀遊)기행), 사행(使行), 유배(流配)·피란(避亂)기행(紀行) 등 몇 종류로 나뉘어 진다.


 빼어난 산수(山水)를 찾는 기행문은 유람기행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사행기행은 사신(使臣)으로 따라가서 유람을 하게 된 해외유람으로 산수를 찾는 것보다 이국정취, 대인관계의 기술들이 강조되었다. 유배(流配)·피란(避亂)기행은 작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 즉 귀양살이나 전란을 피해 다니면서 체험하는 생경(生硬)한 경험이 중심이 되는데 작자가 처한 절박한 현실을 극복해 내는 고난상이 글 속에서 승화되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하지만 현대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① 일기 형식 기행문, ② 생활문, ③ 편지, ④ 감상문, ⑤ 보고문, ⑥ 안내문, ⑦ 논설문 형식 기행문 등으로 씌어진 형식에 따라 나누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형태보다는 내용 및 글의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고자 한다.


 

  ① 일정(路程) 중심의 수필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기행문은 언제 떠나서 언제 돌아온다는 노정(路程),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가의 목적과 목적지, 무엇을 보고 듣고 겪었는가의 견문 체험적 내용,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느낀 감상 등이 내용이 된다.


 

  '6월 20일(목요일) 아침 8시 35분 비엔나 서부역에 도착하니 날씨가 쾌청하다.‘ (39쪽)


  ‘ 어젯밤 내내 국제열차에 몸을 맡긴 채 스페인과 프랑스를 거쳐 6월 28일(금) 아침 8시 20분쯤에 스위스 제네바의 중앙역 코르나뱅에 도착한다. (107쪽)


  ‘6월 24일(화요일)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일기를 정리하고, 오늘의 여정을 미리 책을 따라 거닐어본다. 7시부터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8시쯤 떠나기로 한다.(157쪽)


              이상, 이상보 기행수필집 <동서유럽과 터키 둘러보기> 중

 


 이처럼 일정(노정) 중심의 수필은 연대적인 기록처럼 여행기간을 명시해 놓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도 그 때의 상황을 추적 비교해 보기가 좋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으나 읽는 이에겐 그런 일정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다.

 


 ② 느낌 중심의 수필


    기행수필을 문학작품으로 승화 시킨다는 면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형식이다. 그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현재와 과거(그 때)를 비교하며 나름대로의 느낌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내려 하는 수필작법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아진 강가에서 맞이하는 새 날, 아버지와 어린 딸이 한 가닥 물줄 되어 스며들던 폭포의 강, 어쩌면 산다는 것은 강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폭포처럼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고, 일어서서 흘러야 하는 것도 아닐까.’ 최원현의 <서서 흐르는 강> 중



 ‘언덕 위에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다 본 옛날 로마공화국 광장, 그 넓은 광장엔 부서진 벽과 돌기둥, 대리석 조각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한쪽에 원로원 벽돌건물이 남아있고, 키케로 등 웅변가들이 화려한 수사(修辭)로 열광 시키던 연단 자리를 안내인이 가리키는 데도 폐허만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혜자 <자유의 금빛날개> ‘로마의 휘파람’ 중

 


 ③ 역사․유래 중심의 수필


    역사나 유래는 독자의 흥미와 지식을 충족시킬 좋은 읽을거리다. 이것을 잘만 이용하면 좋은 글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전체 내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보면 결국 내 글은 없게 된다. 역사나 유래를 통해 역시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고 있는 가를 잘 포착하고 그걸 주제감 있게 풀어내는 힘이 있을 때 읽을 맛 나는 수필이 된다.


 

  ‘그 절 앞마당 가에 수령이 40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암자를 세우고 불교가 대중 속으로 스며들게 한 대사를 기리는 뜻으로 '도성대사나무'라 이름 지었다는 나무다. 일연이 지었다는 삼국유사에는 이 암자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도성대사는 신라 혜공왕 때 도성암을, 흥덕왕 때 유가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도성암은 유가사의 부속암자로서 참선도량으로 유명한 해발 700m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에 이 비슬산에 도성(道成)과 관기(觀機) 두 스님이 숨어 살았는데 관기의 거처는 남쪽 영마루에 있었고 도성은 북쪽 도통바위 근처 초막에 살고 있어서 그 거리가 약 10리쯤 되어 가시덤불을 헤치고 휘파람을 불며 서로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둘은 도술로 보고 싶을 때에는 나무와 풀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성철용의 <비슬산 산행> 중


 

 ④ 디카(디지털 카메라) 기행수필


   요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애용되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대부분의 기록을 대신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 저것 뭐지? 그 순간 어느새 손에선 카메라가 터진다. 순간이 화면으로 포착된다. 손전화기엔 높은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고, 학생들 책가방 속엔 대부분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있다. 더욱이 여행이 많아진 요즘엔 디지털 카메라는 필수품이다. 여행의 기록을 글로 옮기던 시대에서 어느덧 사진 또는 동영상으로 기록화 시킨다. 그렇다면 이것이 기행문학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바로 디카 기행수필의 탄생이다. 


  정목일은 ‘디카수필은 즉시성, 현장성, 기록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쓰기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 풍경은 오래 동안 가슴에 담아 우려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순간의 진실과 감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고 굴절되기 때문에 즉시성과 현장성을 부각시키는 디카 수필에서 순수성을 여과 없이 살릴 수 있다. 수필 장르에 속하는 일기문, 기행문, 감상문의 경우는 즉시성과 현장성을 살리는 게 효과적이기에 디카 수필의 활용도가 많으리라고 본다.’고 했다.

 


 ‘우리는 스쳐가는 것들의 인연을 그냥 놓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순간의 모습과 느낌들을 망각의 뒤안길에 흘려보내지 않고, 영상어로 남겨 재음미하고 공감을 넓혀보려는 것이 디카 수필의 의도성이다.


  한 편의 수필이 감동을 얻으려면 발상에서부터 퇴고에 이르기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하고, 공을 들여야 할 때가 있다. 디카 수필은 이런 경우완 달리 즉흥적으로 쓰는 수필이기 때문에 심오성과 사상성, 서정성, 완벽성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수필이 갖는 자유분방함,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다양함, 순발력 등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본다. 또한 즉흥성이 갖는 가벼움이 있을 것이지만, 순간적인 공감대의 발견과 깨달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져본다.‘


  정목일의 말처럼 디카수필은 가장 현장감 있는 수필이 될 수 있다.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맞게 글을 쓰는 것, 기행수필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앞으로 많이 시도 되어야 할 것이다.

 


4. 기행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기행수필은 문학수필이다. 단순한 여행의 기록을 넘는다. 문학은 창작이다. 얼마큼의 창작력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아냈느냐에 작가의 역량이 달려있다. 여행을 떠나서 그 지방의 명승고적, 특색, 인정, 풍속, 산업 등에 대하여 보고, 들은 사실이나 겪은 일을 느낌을 곁들여서 적되 생활언어가 아닌 문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씌어진 수필, 곧 표현의 문학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1) 기행수필의 내용


  기행수필에는 여정, 견문, 감상의 내용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다음의 특성을 고려하여 씌어져야 한다.


 ①.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 글감이 된다. 하지만 정말 신선한 것, 특별한 것을 글감으로 취한다.


 ② 글쓴이에게는 여행기요, 읽는 이에게는 안내문이 될 수 있지만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③ 단순한 시간의 경과, 여행한 차례가 아니라 5백년, 천년을 거슬러 그 시대에 도달해 보고 그 시대와 현재를 ‘나’라는 타임머신으로 연결시켜 옛과 지금이 함께 흐르게 해야 한다. 


 ④ 새로 보고, 들은 일에 대한 느낌이 중심이 되지만 그것들이 오늘 이 시대의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⑤ 나만의 개성이나 독창적 생각이 나의 글쓰기 특성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글이 되도록 한다.

 


 2) 기행수필 쓰기



  ‘여행처럼 신선하고 여행처럼 다정다감한 생활은 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것들이다. 새것들이니 호기심이 일어나고 호기심이 있어 보니 무슨 감상이고 떠오른다. 이 객지에서 얻은 감상을 쓰는 것이 기행문이다. 객지에서 얻은 감상, 그러니까 어디로고 떠나야 한다. 가만히 자기 처소에 앉아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멀든, 가깝든, 처음이든, 여러번째든, 어디로고 떠나야 객지일 것이니 기행문에는 (1) 떠나는 즐거움이 나와야 한다. (2) 노정(路程)이 보여져야 한다. (3) 객창감(客窓感)과 지방색이 나와야 한다. (4) 그림이나 노래를 넣어도 좋다. (5) 고증을 일삼지 말 것이다.’(이태준의 <문장강화> 6.기행문 중)

 


  그렇다. 기행문은 자유롭게 씌어지는 글이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 속에 다른 데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내야 한다. 기행수필만의 맛과 멋이다. 그 맛과 멋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① ‘나도 월파정에서 부서지는 달빛 아래 첫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달빛이 새드는 소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 어색한 입맞춤을 했다. 멀고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그 소녀도 아마 첫 입맞춤이었으리라. 덤덤한 것도 같고 섬찟한 것도 같은 그러나 따듯했던 그 어색한 입맞춤의 소녀는 열여덟이고 나는 열아홉살이었다. 세상이 다 캄캄해지는 것 같던 첫 입맞춤을 누군들 잊으랴. 월파정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첫사랑의 기억을 갖게 해준 푸른 잔디밭이었던 것이다.’ (김용택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중 ‘아,그리운 월파정!’에서)


 

② ‘얼마나 잤을까. 수면을 재촉하던 감미로운 바퀴소리가 때 아닌 함성으로 찢어졌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였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복도에는 이미 일행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맞는 광막한 사막의 일출, 어제 홍산에서 놓쳤던 바로 그 태양인가 보았다. 하룻밤을 외박하고 돌아온 그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초야를 치르기도 전에 외박하고 돌아온 신랑을 기다리듯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경 수필집 <실크로드를 가다> 중 ‘돈황 가는 길’에서)


  위의 글에서 보듯 ②만 기행수필이다. 그러나 작품의 전개나 느껴지는 분위기, 리듬감은 ①이나 ②가 별로 다르지 않다. 기행수필이라는 선입견적 제약을 벗는 것도 중요하다. 사물을 보는 눈, 그걸 보고 느끼는 감정,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힘, 이 삼박자의 조화가 바로 공감-감동을 여는 것이다. 일반 서정수필이건 기행수필이건 먼저 자연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스스로 하나가 되어줄 수 있을 때 그 글을 읽는 독자도 하나가 되어줄 수 있다.


   수용미학자들은 문학작품의 수용은 '작가·작품·독자'의 삼각관계인데 독자가 작품을 읽음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독자란 문학작품의 일차적 조건인 수취인이며, 작가·작품·독자의 삼각관계에서 독자는 수동적인 대상이나 단순한 연쇄 반응이 아니라 역사를 형성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때의 역사란 문학작품의 역사로 독자는 문학사 내에서 '중재하는 심판자'의 역할과 작자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피드백의 역할을 하는데 문학작품 이해의 출발점을 독자로 보기 때문에 개별 작품 연구 및 문학사에 있어서도 독자를 작품구조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고 이들 독자의 반응은 문학작품을 읽고 무엇인가 언급하여 기록을 남겨 그것 자체가 또 다른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기행수필에서 중요시 할 점이 바로 이 수용미학적 관점이다. 자칫하면 저녁에 써서 덮어두는 일기장처럼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렇지만 기행수필은 특히 독자를 의식해야 한다. 지기도취로 나만의 독백이 되면 안 된다. 읽을 맛은 최소한 지식제공에서 독자에 대한 서비스로 감동에까지 이어져야 한다.


 

 방현(坊縣)을 지나 다시 들어가는 산과 산에도 단풍은 연지 곤지 점점이 붉었다. 흡사 입술을 지그시 물며 생긋 비켜서는 여인의 모습 그대로다.


 하얀 절벽을 높이 돌아 넘는 <세계 도원경>이다. 바야흐로 가을이 물들기 시작한 선인동에 오막살이 굽 집이 한가롭기도 하다.


  백리 산속에 바위굴이 하나/선인골 홀로 살이 무슨 재민가요/모르면 그대로 웃고나 지나가소.


  보이지도 않는 도사와 몇 마디 주고받는 동안에 소형버스는 바위굴을 지나간다. 태풍 루사와 사라호가 그 억센 비바람을 몰고 되찾아올지라도 끄덕하지 않을 보금자리다. 맑은 물과 공기와 다사로운 심성은 자연이 베푼 은덕이다. 이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도홍경(陶弘景)의 시구다.


  산속에 무엇이 있겠나이가/영마루에 흰구름만 떠돕니다./죄만스럽게도 혼자 즐길뿐/님께 보내드릴 길이 없나이다/ (송규호 수필집 <아득한 길>중 ‘신농가’에서)


 

 시를 삽입한 느낌 중심의 수필이다. 표현도 시어처럼 정겹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 느낌을 무리없이 펼쳐내다가 도홍경의 시구를 인용하여 할 말을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내 표현력보다도 더 좋은 게 있으면 빌어다 쓸 수 있다.


 

‘나는 물 속에 드리운 내 그림자를 보며 나직이 읊조린다. 명사산은 월아천이 있어 아름답다. 사막에서 절망하지 않음은 땅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있음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슴 깊은 곳에 초승달 같은 사랑을 숨기고 있음이. 메마른 삶 어디엔가 숨어있을 눈부신 보석 하나. 월아천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변해명 실크로드기행 <길 없는 길을 따라> ‘명사산 월아천’ 중


 도란도란 정겹게 얘기하듯 문장을 풀어간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눈이 관조의 눈이다. 사색의 눈이다. 그것은 곧 마음-내면으로 흘러든다. 작가의 마음이 읽는 이에게 그대로 동화되고 그게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디카기행수필은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는 광경을 사진으로 잡아 글과 합체를 시키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보이는 현장감 및 사실감만으로도 감동일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수필의 미감을 더하는 곧 그 상황에 맞는 글을 접목시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 내는 방법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영원하지 않다. 시간과 공간에 자유롭지 못하며, 사라져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모든 것들이 스쳐가며 일생은 태어날 적부터 떠나는 행위에 속한다. 우리는 여행길에서 만나고 헤어질 뿐이다.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며, 아름다움과 추함도 스쳐간다.


                ’ 정목일의 디카 수필 <스쳐가는 것들의 영혼> 중

 


  정연하게 서있는 가로수 사진에 이 글을 넣어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해 낸 방법이다. 사진과 글은 상호보완적이면서 독자에게 읽힐 때엔 하나의 주제감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문학이란 궁극적으로 감동을 위한 것이고 그 감동이 행복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수필은 특히 내 체험이 문학으로 승화한 것이고 그 승화된 이미지는 독자에게 오래도록 공감으로 그 가슴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게 감도의 여운이다. 기행수필 쓰기는 그래서 더 어렵다. 생생하게 지금 본 사실을 글에서는 아주 잘 익은 술처럼 묵혀 향기롭게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記述)은 설익은 술과 같이 떨떠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학적 기술(技術)이 필요한 것이다.


 

5. 기행수필의 맛과 멋


  기행수필에는 맛과 멋이 있어야 한다. 맛은 읽어서 느껴지는 미적 감각 곧 감흥이다. 눈으로 본 것처럼 감동으로 펼쳐지면서 시간을 초월하는 생각내기, 그리고 표현력, 문장력이 읽는 이를 현장으로 옮겨놓는다. 나는 보아도 그런 감동을 못 느낄 것 같고 감동이 일어도 표현할 수가 없는데 기행수필을 읽으면서는 오히려 본 것보다 더 생생하고 감동적이게 느껴진다면 그게 맛깔스런 수필이 되었다는 얘기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맛을 끌어내는 힘을 말함이다.


  또 하나 멋이란 기행수필엔 품위가 있어야 한다. 곧 글의 분위기와 내 품격이 잘 어울려 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저 감흥에 치우쳐 표현이 글의 품격을 잃게 하거나 겨우 한 번 가 ㅂ논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처럼 폼을 내며 쓴다거나 적확(適確)치 않은 소개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면 글의 품위를 잃게 된다. 자기 수준에 맞게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글쓰기가 중요하다.


 기행수필은 풍경묘사나 역사탐방 해설처럼 씌어져 버리면 글의 맛도 멋도 잃게 된다. 무엇보다 남이 보지 못한 것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도 듣는 눈과 귀를 갖고 그걸 가슴에서 키우거나 여과해 내는 문학적 역량으로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는 글을 쓸 때 좋은 기행수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