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隨筆家協會 국내 세미나/2009.10.13(화)-14(수)
현대 한국수필문학의 과제와 모색
- 아름다운 수필문학의 시대를 열기 위한 제안 -
최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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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시대일 거라며 흥분하며 맞았던 21세기도 어느덧 9년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그만한 흥분과 기대를 충족시켜 주거나 21세기 수필시대의 주역으로 크게 떠오른 사람도, 다른 문학 장르에 비교해 역동적 힘을 보여준 것도 없다. 그저 수필은 여전히 선비문학이란 표현처럼 조용히 점잖게 유연히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문단에서의 양적 점유력에선 가장 급격한 발전을 한 게 수필이고 수필 전문 잡지들도 어느 장르보다 활발했다. 하지만 수필은 여전히 자기만족적 문학으로 자족하는 소극적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점은 있는 것일까. 수필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답답하고 부끄럽다. 하기야 명확한 해결방법이 있었다면 오늘의 이 자리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찾아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간 수차 논의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더 생각해 보고, 또 좋은 방법도 찾아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환기시키고 각성도 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수필문학에 대한 이해다. 수필문학에 대한 개념 정립 및 이해 제고는 아직도 숙제인 것 같다.
에세이는 문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다. 국제펜클럽의 P.E.N만 하더라도 '시인(poets)·극작가(playwrights), 편집자(editors)·수필가(essayists), 소설가(novelists)'의 머리글자들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왜 유독 수필만 자기 자리를 의식치 못할까. 그건 독자보다도 수필가 스스로가 왜곡된 개념에 사로잡혀 있음일 것 같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수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런 개념하에 너무 쉽게 수필을 시작했던 것이다.
‘수필’ 하면 무형식의 문학, 붓 가는대로 쓰는 문학, 자기가 경험한 것을 글로 쓴 것 등으로 쉽게 말한다.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는 정의임에도 숨겨있는 깊은 뜻은 버리고 겉 뜻만을 취하여 그 수준 안에 자기를 가두고 있다.
이미지 문학으로서의 시, 체험과 생각의 산문문학인 수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긴 글 문학의 소설로 문학이 대표됨에도 유독 수필만 의붓자식처럼 다른 문학과 같이 있어도 좌불안석이다. 왜 그럴까.
우리의 국어사전들엔 수필(隨筆, essay, 에세이)을 ‘하나의 주제를 평이하고 간단하게 쓴 문학적인 글’(브리태니커 사전),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산문 문학’(한국어 위키백과),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초등학습사전)이라 했고, 좀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또는 어떤 양식(樣式)에도 해당(該當)되지 아니하는 산문(散文) 문학(文學)의 한 부문(部門). 인생(人生)과 자연(自然)에 대(對)한 수상(隨相), 수감(隨感), 단상(斷想), 논고(論考), 잡기(雜記) 등(等)이 포함(包含)되며,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형식(形式)이 없이, 보통(普通) 1∼2 페이지 또는 30 페이지 가량 되게도 씀. 개성적(個性的), 관조적(觀照的) 또는 인간성(人間性)이 내포되게, 위트, 유머, 예지(叡智), 기지(機智)로써도 표현(表現)함. 만문(漫文). 산록(山麓). 상화(想華). 에세이’ 라고도 풀이 되어 있다.
따라서 ‘평이하고 간단하게’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쓴‘이라는 표현들이 수필의 정의를 주도해온 덕에 ’붓 가는 대로, 형식(形式)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라는 개념의 오해가 아무렇게나 끄적여 놔도 수필이 된다는 왜곡된 정의를 불러왔다는 말이다. 해서 이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 정의하여 수필이 어떤 문학이고 어떻게 씌어져야 한다는 적극적 방법론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수필의 정의 및 개념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붓 가는 대로, 형식(形式)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하다. 이 함정은 피천득 선생의 ‘붓 가는 대로 쓴 글’과 김광섭 선생의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라 했던 말의 문자적인 수용이다.
이에 대하여 지난 2008년 7월 15일 수필의 날에 가졌던 김봉군 교수의 특강 중 수필에 대한 정의는 필자도 공감하는 바라 그 정의를 인용해 보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써도 될 만큼 세련된 문체와 구성으로, 사실에 바탕을 둔 농익은 체험의 세계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거나 비판적 사유(思惟)의 세계와 지혜를 표출하는 통합 장르적 문학 형식이다. 서정 수필을 본격 수필로 하되, 서사적 수필 · 비평적 수필까지 포괄한다.’ 였다.
곧 ‘붓 가는 대로’란 ‘붓 가는 대로 써도 될 만큼 세련된 문체와 구성’을 말함이요, ‘생각나는 대로‘란 ‘자기가 겪은 체험의 세계이니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거침없이 자신 있게 자기체험을 농익게 표현한다’는 것이요, ‘형식(形式)이 없이’란 시나 소설처럼 이미지나 서사에 제약 받지 않고 통합 장르적 문학 형식을 취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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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위의 개념 위에서 우리 수필이 안고 있는 문제들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다.(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① 수필가의 역량 문제일수도 있겠는데 시도 안 되고, 소설도 못 쓰겠으니 수필이나 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무렇게 쓰기만 하면 수필이 된다고 오해를 하고 있다. 요즘 경향은 50대 이상의 생활에 여유가 있는 주로 여성들이 문화센터 등을 이용하여 강좌를 듣고 등단을 한다. 자질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1년 내지 2년 정도 수강을 하게 되면 두 세 편의 작품은 만들게(?) 되고 그걸로 등단이란 관문을 통과하는 걸로 되어 있다. 결국 정말 글을 잘 써서인 경우 외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과 금전적 투자만 하면 수필가로 등단이라는 결과도 주어진다.
② 여기에 일조를 하는 것이 문학지들이다. 작품성보다는 웬만하면 등단을 시켜 등단지의 판매수익으로 출판비를 보전하고 그 등단작가로 문단 세력까지 구축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취하고 있다.
③ 등단 자에 대한 책임(사후관리)을 지지 않는다. 수필가란 이름을 부여해 주었다면 최소한 그가 수필가로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사후관리도 해 줘야 하는데 등단 후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④ 등단 잡지 소속의 신인들은 자동적으로 산하 문학회에 가입케 하고 출신 작가 동인회 활성화란 명목으로 다른 쪽에는 눈을 돌릴 수 없도록 하여 자유로운 활동까지 제한한다.
⑤ 그러면서 상업주의와 자기 이기주의를 팽배시켜 자기들의 성(城)을 쌓는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글을 모았음에도 xx년도 명산문집, xx년 한국을 빛낸 작가들, xx년 대표에세이, 한국대표명수필선 등 독자가 현혹될 수 있는, 객관성도 다른 작가도 고려치 않는 자기 나타내기식 제목 붙이기로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1년에 등단하는 수필가가 5백 명이 넘고, 발표되는 수필만도 1년에 1천편이 넘는데다 출간되는 수필집과 수필을 싣는 잡지의 수도 엄청난데 그런 건 고려치 않고 자기들 동아리 위주의 선정 작업으로 거창한 제목을 붙여 출간하여 독자에겐 모든 수필들 중에서 엄선한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제목만 보고 이게 한국의 대표적인 가장 훌륭한 수필가들의 수필인가 보다고 판단하고 읽게 되고 그 결과 이런 게 무슨 최고의 수필이냐고 실망을 하게도 된다.
둘째는 수필이 중산층의 장년문학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09. 9. 17.《에세이21》창간 5주년 기념 한.중 수필문학세미나와 2009. 9. 20. 타이페이 국립대만대학에서 개최된 한.중수필문학세미나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중국이나 대만이 20세 전후의 청소년들에게 수필의 길을 활짝 열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대만만 하더라도 50년 전통의《幼獅文藝》(유사문예)는 10-20세의 신생작가를 배출하고 있다 했고, 30년 전통의《明道文藝》(명도문예)도 전국학생문학상 제도를 통해 12-18세의 수준 있는 작가를 발굴해 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수필은 중산층의 장년(壯年) 문학으로 굳어져 있다. 문학이란 20대의 문학, 30대의 문학, 40대, 50대의 문학이 있기 마련인데 수필만 ‘서른여섯의 장년 문학’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40은 되어야 수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삶의 내공(체험)이 쌓여야만 수필을 쓸 수 있다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젊은 수필가 내지 젊은이들이 쓸 수 있는 수필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필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 체험을 통한 자기 성찰이기에 장년에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이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서른여섯을 넘어 인생을 얼마큼 안 다음, 인생에 대한 성찰과 삶을 관조할 수 있어야 수필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독단이 아닐 수 없다. 20대, 30대의 문학은 없고, 40대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장년문학이 수필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 된 것이다.
거기다 수필가들이 대부분 생활이 안정된 중산층 여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생활의 안정과 수필 작업은 수필가란 멋스런 이름 하나를 얻는 것 이상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도 문학인 이상 목숨을 걸고 글을 쓸 만큼 열정적인 프로 작가가 나와야 할 텐데 여유로움 속에서 태어나는 수필은 가정이나 신변 에피소드를 감상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문학으로서의 수필 위상 회복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필은 숙성된 체험을 문학화 하는 것인데 요즘 수필은 체험의 기록에 머물 뿐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체험 또한 전 시대적인 것들로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흥미로움도 신비로움도 발견할 수 없는 그저 같은 시대를 산 어른들의 사랑방 이야기가 되어 젊은 독자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수필이 문학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키 위해선 고려 청자, 이조 백자 같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수필문학으로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빠진 수필은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체험적 사실에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이 혼합되어 공감(共感)과 동감(同感), 감동(感動)을 끌어낼 때 문학이 될 수 있는데 덜 익은 체험의 기술로 맛도 멋도 내지 못하고 있음이다.
고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心眼),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귀,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 특별한 발상에 예술적 상상력으로 버무려 만들어 내는 수필일 때 수필다운 수필이 되는 것이다. 뿐 아니라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보다 변화를 수용하고 극복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힘을 보이는 수필이 되어야 한다.
수필 독자는 줄어드는데 수필가는 늘어난다고들 말한다. 최소한 수필가는 수필의 독자가 될 것이니 그러면 수필가가 많아진다는 것은 수필 독자도 자연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수필은 동인문학 내지 취미문학의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한다.
수필가가 수필을 읽는가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답을 할 수가 없다. 수필을 쓰는 수필가가 한 달에 다른 사람의 수필을 몇 편이나 읽을까. 수필 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학에도 대단히 유연하다. 결국 수많은 변화와 널려있는 지식들도 가슴과 머리에 담지 못하고 닫힌 생각과 가슴으로만 수필을 쓴다는 것이다.
이제 문학은 순수 엘리트 집단의 신성한 작업으로도 생각되지 못한다. 인터넷이 일반화 되면서 이제 문학은 독자와 작가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쓰고 있다. 심지어 사전조차도 전 세계인이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Wikipedia)은 인터넷 상에서 만들어지는 백과사전이다. 2001년 1월 15일부터 비영리 단체인 위키 미디어재단이 운영하며 2008년 4월 현재 영어판 2백7십7만여 개, 한국어판 10만여 개를 비롯하여 모든 언어판을 합하면 1000만여 개 이상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전 세계 200여 개 언어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한국도 2002년 10월부터 시작했다.
인터넷상에서 GNU 자유문서사용허가서(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 GNU FDL, GFDL)에 따라 모두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체제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양한 방면의 지식들이 방대한 분량으로 자세히 수록되어 있고 내용이 끊임없이 갱신되며 접근이 편리하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선 가장 많이 참고자료로 애용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수필만 흘러간 과거 얘기를 늘어놓으면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세대들에겐 당연 관심 외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재미있는 문화도 다 즐기지 못하는데 재미없는 어른들의 문화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흥밋거리, 배울거리, 관심거리를 제공해 줘야 한다.
최근 노래방엘 가면 젊은이들도 우리의 흘러간 옛 노래들을 부른다고 한다. 그건 우리가 부르라고 한 게 아닌데도 그들이 불러보니 그 분위기에도 잘 맞고 부를 만하니 곧잘 부르게 된 것이다.
수필문학 또한 전 연령대가 즐겨 읽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독자가 될 수 있는데 나이가 젊으면 못 쓰는 수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인터넷 문화 속의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쓰는 글이 수필인데도 수필은 여전히 그들 밖에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넷째 최소한 작가는 독자를 압도할 힘을 가져야 한다.
요즘은 덜 그러지만 한 때 우리의 영화나 드라마는 한참 또는 몇 회를 보지 않다가 보아도 전혀 연결에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갈 내용이 짐작이 되면 더 이상 읽으려 하질 않는다. 짧은 수필이지만 첫 문장 내지 첫 문단만 읽으면 더 이상 읽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결정된다. 특히 자신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면 더더욱 흥미가 없다.
그가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한 것, 알지 못한 것이 흥미롭게 전개될 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우리 수필계를 보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글이 잘 안 보인다. 그런데도 신인은 양산되고 자질 미숙의 수필가도 늘어나고 있다. 문학지들도 새로운 기획을 못 보이고 조금 좋다하면 그 편집 체제의 모방을 서슴지 않는다.
이제 수필도 전면적인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형식도 내용도 신선한 것이 필요하다. 최근 수필 전문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들 중《한국수필》의 ‘컷이 있는 에세이’나《에세이문학》《에세이스트》등에서 추구하는 중편수필, 그림이 있는 수필, 퓨전수필 등 실험수필을 시도하는《현대수필》, 창작수필과 비평을 연결하는《수필과 비평》, 소수 정예의 역량있는 수필가를 발굴해 내고 키워가는《수필세계》등의 참신한 기획은 아주 바람직하다.
아무튼 어디에 있건 불은 늘 오슬오슬 춥다. 그래서 부단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온몸이 덜덜 떨리고 살에 소름이 돋는다. 불은 엄습하는 한기를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춤을 춘다. 허리를 구부렸다 펴고, 앉았다 일어서고, 뒹굴고, 움츠렸다 길게 뻗고, 휘감고, 뛰고... 그렇지 않으면 금세 오금이 굳어 일어설 수 없게 된다. 춤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정희승의 <불> 중)
좋은 기획이라 해도 작가가 받쳐줘야 한다. 누가 불이 춥다고 생각 하겠는가. 그러나 정희승은 불은 늘 오슬오슬 춥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단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추워서 온갖 짓을 다하며 추위를 몰아내려하는 불의 몸부림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작가의 생각, 작품을 원한다. 독자를 압도할 힘을 갖는 작가, 그래야 독자의 가던 길을 멈추게 할 수 있고, 멈췄으면 그냥 갈 수 없게 만든다. 시를 능가하는 이미지적 작품으로 작가의 생각이 독자보다 늘 한 수 위에 있는 게 보인다. 따라서 좋은 기획에 좋은 작가가 잘 맞아 독자를 행복하게 해 주는 좋은 예이다.
요즈음 인공 미인이 많다. 인공미인 일수록 유행에 민감하다. 입는 것이 유행하면 많이 입고 벗는 것이 유행하면 앞 다투어 벗는다. 요즘은 입기는 하되 많이 내 보이는 것이 유행이다. 윗옷은 내려 입고 아래옷을 올려 입는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면 중간부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어깨와 가슴과 배꼽과 다리가 다 드러났다. 입을 것을 덜 입은 것인지 벗을 것을 덜 벗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번식이 끝난 지 오래된 사내들은 덜 입은 것이 위험스러워 보여서 애가타고. 아직도 번식력이 넘치는 사내들은 덜 벗은 것이 아쉬워 몸이 단다. 인공으로 미인이 되어 덜 입거나 덜 벗는 패션으로 뭇 사내들을 애를 태우고 몸 달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강호형의 <폭력>)
정희승과는 다른 시각이지만 예사로 지나쳐 버렸던 우리의 눈과는 달리 대단히 정밀하게 보고 있다. 그러면서 유머와 위트를 담아 자기 할 말을 하고 있다. 수필이 수필답다는 것은 독자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자기들이 생각 못해내는 것을 보여주길 바란다. 독자는 항상 작가로부터 KO패를 당할 때 즐거워하고 행복해 한다.
아버지의 시대가 다르고 아들의 시대가 다르면 문화도 생각도 희망도 다르다. 그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그들을 부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동(童)수필, 단(短)수필, 퓨전(fusion)수필, 장편(長篇)수필도 가능하다. 수필도 이미지를 품을 수 있고 소설의 반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지도 반전도 품지 못하고 점잖기만 하다.
다섯째, 비평의 부재와 비평 수용의 빈약함이다.
문학은 비평이 살아있어야 발전한다. 시나 소설의 비평은 비교적 활발하다. 그러나 수필비평은 작품 비평조차 자칫 작가에 대한 비평이 되기 쉽다. 작품의 내용이 작가의 진솔한 삶의 진술이고 보니 그 삶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가 어렵고 작품의 내용에 대한 비평도 많은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연 수필비평을 하려는 비평가가 많지 않고 또 창작 작품의 비평보다는 여러 면에서 난제가 있다. 더구나 비평을 수용하는 자세에서도 자칫 인격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할 수 있어서 본의 아니게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생긴다.
비평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을 읽는 고급 독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독자는 곧 왕이다. 독자는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걸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많은 독자 중 하나의 생각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볼 수도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이 그렇게 읽게 했고 생각게 했을 수 있다.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평론가 역시 그런 독자의 하나로 볼 때 작가의 왕일 수도 있다. 그러니 더욱 그의 평을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수필은 발전할 수 있다. 여인에게 맞대놓고 누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애정이 있을 때 지적도 조언도 하게 된다. 비평을 수용하는 자세 그리고 바른 비평을 할 수 있는 비평가가 많아져야 수필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사이버문학에 대한 접목이다.
이제 문학도 사이버 공간을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현재는 사이버문학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별개로 하려 한다. 상호보완적 차원에서 활용하며 함께 발전해야 하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고 현상이다. 물론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각기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가장 덕을 볼 수 있는 문학 장르가 수필이다. 짧은 수필에 영상을 곁들이고 음악을 붙이면 종합예술이다. 수필이 가장 유리하다. 그런데 수필가들의 연령대가 대부분 50이 넘어있다. 그러다보니 컴퓨터와 친하지 못하다. 요즘은 책을 사는 것도 서점보단 온라인상에서 더 잘 이뤄진다. 내용을 미리 보고 비교해 볼 수 있고 더 값싸게 집에서도 편히 받아볼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에 친하지 못하면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자기를 알릴 수도 없다. 내 작품을 알릴 수도 없다. 수필이 가장 이로운 장르임에도 그걸 활용치 못해 얻을 것을 얻지 못하고 있다. 뿐인가. 그냥 종이책만을 중시하고 있다. 힘들게 쓴 작품을 내 돈 들여 출간하고 그걸 내 돈 들여 우표 붙여서 우체국까지 싣고 가 무료로 보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홍보도 못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목, 수필가들에겐 대단히 시급한 문제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3
수필문학은 ‘정겨운 벗과 나누는 담론과도 같고 가까운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와도 같은 문학이다.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어도 오히려 더욱 진한 멋과 여유를 지니고 여운과 방향을 드러내는 문학이다.’(한상렬의 <수필문학의 올바른 인식> 중)
또한 수필가는 ‘지나간 사건이나 앞으로 다가올 유형무형의 존재에서 새로운 존재를 탐색하는 존재의 탐구자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가는 우주 전체의 어떤 모습까지도 정신의 영토 안에 이식하는 사색적 접목술을 지닌다. 현세를 중심으로 과거세, 미래세 까지를 일시에 수용하는 혜안을 갖는다’(劉秉根의 <抒情隨筆과 敍事隨筆의 文學性> 중)
그러나 현대라는 21세기의 특성은 국제화, 정보화, 세계화다. 디지털 시대와 정보기술의 확산, 가속화를 기반으로 한 지식사회로의 전환에 부응하여 가치관도 새롭게 정립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가치관은 인간 중심 가치관이기보다 물질 위주이고, 성과, 능력 등 결과 위주이다. 뿐 아니라 유연성과 섬세함․인내력 등이 요구되는 시대, 서바이벌게임처럼 살아남는 자에게만 가치가 적용되는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변화도 많고 다양한 요구와 다양한 능력이 공존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때에 문학 특히 수필문학이 한국수필문학으로 자리를 확보하고 발전해 가기 위해선 이상에서 언급된 문제들을 해소하고 미래문학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중년문학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젊은 수필가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선 수필 전문잡지들이 청소년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수필 공모전을 갖거나 대학에서 수필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받는 경우 지원 및 등단의 기회를 부여하는 등 젊은 층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사이버문학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수필에 관한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수필박물관 같은 사이버문학관은 출간되는 도서의 소개, 작가에 대한 소개, 좋은 수필들의 소개, 수필 관련 논문 및 잡지, 좋은 수필가 소개 등 다양한 내용으로 수필 독자 내지 애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뿐 아니라 수필 전문 비평가 양성으로 수필의 문학성 회복 추구와 폄하 폄훼에 대한 방어 및 수필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또 하나 독자를 사로잡는 수필 생산력을 기르는 일이다. 그러려면 등단작가라도 계속적이고 체계적인 수필의 공부 및 심화학습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특히 수필문단 전체를 아우르는 기구 및 연합 세미나 개최(주최자를 바꿔)도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어른이다’라고 말하기보다 ‘저 분이야말로 어른이다’라고 존경할 수 있는 어른도 필요하고 그래서 한국문단에 수필계 원로가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다.
이 모든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만 조금씩 마음을 합하고 뜻을 합하면 이뤄질 수 있는 일이라 본다. 수필을 사랑하는 일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서로 먼저 나서며 이루려 한다면 우리 수필문학은 우리 대에 가장 아름다운 문학의 시대를 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최원현 수필가.한국필가협회이사
수필가. 문학평론가. 수필문우회원. 한국수필가협회·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크리스천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수필세계·좋은 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등 11권.
[한국수필가협회 국내 세미나(2009.10.13~14) 주제발표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