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골터줏대감/남양주의역사인물

춘원 이광수를 위한 변론...(펌)

은빛사연 2011. 5. 7. 10:38

 

춘원 이광수를 위한 변론
이 글은 7.23일 서울대 국사학과 조교수 정용욱이 한겨례의 세상읽기 란에 쓴 「톨스토이, 이광수, 홍명희」라는 글에 대하여 반론의 형식으로 시작한 글입니다.

현실과 엮어 가면 갈수록 점점 더해가는 삶과 죽음의 무상(無常)에 대한 극단의 갈등과 혼돈 속에서 보이지 않는 답을 찾다 못해 종교적 접근에서 그 해결점을 구하여 무저항주의와 자기완성을 찾아가는 미학을 보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와 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인류애와 박애주의,
얼마 뒤 인도의 간디에 의하여 표현 실천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비폭력, 무저항주의,
골수 톨스토이빠로 칭해질 정도로 그의 영향을 깊게 받은 근대한국문학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이광수를 공산혁명을 위하여 한때의 실천적 투쟁의 면면을 보여준 임꺽정의 홍명희와 단순하게 비교하여 논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봐줄 건덕지라도 있었으나

그런 이광수를 서구사상인 근대문명을 동북아시아 삼국 중, 가장 먼저 받아들여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을 정도로 바뀐 일본의 그런 근대화를 맹목적으로 동경한 나머지
일제말기 일본 근대의 완성을 예찬하였고 일본의 아시아침략사를 옹호하며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고 은근히 비난과 비판의 손길을 내민 감추기 어려운 속내를 드러낸
서울대 국사학과 조교수로서의 정용욱이 가진 편파적이고 단견적인 식견에 실망감을 아니 표할 수가 없었다.

이 땅의 지도층을 구성하는 소위 일류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식견이 어찌 이리도 근시안적으로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색깔론으로 맹목적 공격을 한다고 우파보수를 매도하지만 계급적 사고관에 사로잡혀 한번 잘못 낀 색안경을 이처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부류들은 과연 진정 어느 쪽이란 말인가.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맹목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광수도 형세를 잘못 판단했든 아니든 우리민족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그리한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인본주의자인 골수 톨스토이맨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독립운동의 표상인 도산 안창호의 추종자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광수의 그런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합리적 논리가 숨어있었음을 왜 보지를 못하는가.
아무리 비판을 하더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1900년대 초반부터의 그 당시의 세계적 시대조류를 보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여 횡행하던 시대로 그만큼 힘의 논리가 중시되었던 시기였다.
조선은 동학과 민비학살로 야기된 수많은 항일무력투쟁으로,
이광수가 쓴 1919.2,8독립선언서와 3.1운동 그리고 일시적 달콤한 승리도 있었지만 연계된1920년 간도참변으로,
총에 칼로 대항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 힘의 열세로,
무리한 무력항쟁으로 민족의 근원적 힘까지 점차 잃어가는 수많은 희생을 껴안고서야 극한 투쟁의 논리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의 민족자체의 역량을 먼저 키우자는 계몽운동은 이런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이광수가 1921년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귀국하는 일은 총독부의 온건정책에 따른 포섭의 결과라는 일부의 견해도 있었으나
외국유학 권유까지 뿌리치고 들어온 것은 민족자체의 역량을 먼저 키워야 하고 무모한 무력항쟁만으로 안된다는 이광수 자신의 자각에서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 후 1922년 가장 문제되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발표된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발전적 혁신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자신부터 반성하고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비판을 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평범한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당시의 조선민족을 강하게 비판하며 일본에 하나도 뒤질 것이 없는 조선민족의 역사적 역량을 되찾기 위하여 민족개조론을 주창한 것을 열등감으로 받아들이고
전통계승과 봉건유교타파라는 절충적 모색을 하나의 낭만적 인식으로만 치부하였고
개개인의 지덕체를 수신하여 근대시민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을 몰역사적 사고방식으로 내몰고 있었다.
쉽게 표현된 실례로 무장투쟁을 지양하고 공산주의적 사고방식을 경계하고 도적같은 태도는 피하자는 그러한 논지도 있었다.

이광수의 그 당시의 사고방식을 보려면 박지원의 허생전을 다시 찾아 일반에게 널리 알린 허생전에서 찾는 것이 가장 빠를 듯하다.
인조의 남한성 치욕을 설욕하기 위하여 북벌론을 주장한 효종시대를 무대로 한 글이지만
비범함을 보인 허생에게 북벌의 비책을 묻는 어영대장 이완에게 건의한 시무삼책 중 청의 호복을 입고 귀한 자식을 청으로 유학을 보내고 허실을 정탐하여 기회를 포착하게 할 수 있느냐는 그 글의 백미이기도 하였지만
이광수의 새로 정립된 가치관을 보여주는 명백한 비교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그런 치욕을 반드시 되갚기 위하여 조선민족이 해야 할 것들을 넌지시 허생전을 들어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능력도 안 되면서 무모한 도발을 하여 조선민족을 허무하게 다 희생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일본옷을 입고 일본문화를 배우고 자체역량도 키우면서 허실과 때를 기다려 독립을 쟁취한다는 논리가 그 속에 너무나 명백히 들어있었던 것이었다.
이광수 내면의 그런 절충적 실천과정 속에서 이광수의 친일매국론이 불거져 나온 것이었다.

민족을 이끌 지도자를 찾아 개척자와 이순신을 펴내며 그런 지도자 하에서 소(우덕송)와 같은 맹목적 복종과 희생으로 단합을 이루어내어 민족의 잃어버린 위상을 되찾자는 그런 절실한 희망들이
1931년에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인 김명식에 의하여 폭력적 지배논리로 비난받았지만
현대적 민주주의 관점에는 그 부당성과 비합리성이 보이긴 하지만 뛰어난 지도자에 의한 왕도정치에 아직 길들여졌던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큰 무리도 없는 논리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하여 독립을 반드시 이루려는 이광수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현 시대에도 북한의 김정일을 이해하려는 내재적 접근법으로도 모자라 그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까지 함께 하려는 일부세력들의 마음의 일부분이라도 한번 그 당시로 돌아가 이광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아라.
과연 얼마나 잘난 자가 있어 분명히 확인되지도 않는 일들을 두고 이광수에게 과연 무슨 죄를 물을 것인가.

반민특위를 앞두고 피하라는 말을 듣고서도 이광수는 자기 나름대로 민족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약점은 조금 있기 마련이고 완벽한 형세판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형세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 몰라도 허생전의 논리를 지식인들의 위선적 태도와 호도로만 보지 말고
그런 허생전의 논리와 민족개조론에 따른다면 이광수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갈망을 과연 누가 부인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공산사회주의의 계급투쟁론과 거리를 둔 이광수를 비난한다면 차라리 그것은 합리적 태도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추호도 반론도 없다.
이광수는 계급투쟁으로 민족자체의 분열을 먼저 야기하는 공산혁명론과는 민족의 단결과 독립을 위하여서도 사상론을 떠나 인정하기 무척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자라면 이광수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광수에 대해서는 역사적 심판이 아니라 오직 역사적 판단과 가치정립만이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주) 이 글은 대한민국 대표 토론 사이트 "필통 한토마"에서 gowoosoo라는 필자가 올린 글을 옮긴 글이다.

     내 의견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인물들을 흑백의 논리로 양분지어 친일파로 매도하는 현실은

     우리가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아픈 현실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슴 쓰린 일이다.

특히나 현 시대에 친일파란 말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대부분이 현대사에서 자신의 욕망(엄밀히 말하면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정치권 내지는 경제부분에서 소외된 자들로 나는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기득권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일이 비일 비재한 것으로 생각되며, 하다 하다 안되니까 이제는 조용히 아물어야 할 아픈 상처를 건드려 편가르기와 흑백논리를 들어 본인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간학한 무리들로 친일파보다 더 사악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