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의 유적지 및 유물)
1.광릉
종 목 사적 제19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
시 대 조선시대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홍릉·유릉
종 목 사적 제20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1
시 대 조선시대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왕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광무 원년(1897)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3.사릉
종 목 사적 제209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65-1
시 대 조선시대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명등석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4.순강원
종 목 사적 제35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인 인빈김씨(1555∼1613)의 무덤이다.
인빈김씨는 조선 16대 인조의 할머니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종된 왕)의 생모이다. 무덤 주위를 둘러쌓는 담장(곡장)을 둘렀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영조 31년(1755)에 무덤을 순강원이라 명하고 지위를 승격시켰다. 또한 위패는 저경궁에 모셨으며, 순종 2년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으로 포함되어 옮겼다.
5.휘경원
종 목 사적 제360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22대 정조(재위 1776∼1800)의 후궁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수빈 박씨는 숙선옹주를 낳고 수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정조 14년(1790)에는 왕자 순조를 낳았다. 순조 22년(1822)에 세상을 떠났다.
철종 6년(1855)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 철종 14년(1863)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에 모셔져 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들과 정자각, 비각이 있다.
6.광해군묘
종 목 사적 제363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인조 19년(1641)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인조21년(1643)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를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7.성묘
종 목 사적 제365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선조 10년(1577)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한 많은 석물이 있으며, 왕의 무덤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비석 등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8.안빈묘
종 목 사적 제36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라는 글이 새겨 있다.
9.영빈묘
종 목 사적 제367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인 영빈김씨의 무덤이다. 영빈김씨는 현종10년(1669)에 태어나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으로 인하여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친정으로 돌아왔고, 영조 11년(1735)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한 영빈김씨의 무덤에는 여러 석물을 세워놓아 죽은 이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다. 그 중 봉분 앞에 있는 비석의 내용을 통해 영빈 김씨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행장과 장례 등 여러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10.진접 여경구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9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286
시 대 조선시대
현재의 소유자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180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산을 뒤로 하고 있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안채와 사랑채·문간채·행랑채·사당채가 연결되지 않고 각각 떨어져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집안 깊숙히 ㄱ자형으로 자리잡았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광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튼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다. 一자형 사랑채·대문채·사당채가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헛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인데 왼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앞쪽으로 광채가 보인다. 광채의 오른쪽 끝에 있는 중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의 평범한 ㄱ자형 집에 안방의 뒤쪽으로 골방·뒷방·광을 둔 것이 경기도 사대부 집의 특이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기단의 높이와 건물의 크기가 같으나 사랑채가 약간 앞으로 나가 위치하여 대문에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안채를 감지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사당채는 사랑채의 뒤편 한단 높은 터전에 따로 꾸몄다.
사랑마당과 안마당의 정원시설은 앞면이 툭 터져 전망이 시원할 뿐 어떠한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지만 안채 뒤안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부엌 동쪽의 조그만 뒤뜰을 지나면 개울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게 심어졌는데 아마도 인위적으로 만든 숲으로 여겨진다.
11.궁집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30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426-1
시 대 조선시대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궁집이라는 칭호는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
전형적인 ㅁ자형의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대문을 들어선 정면으로 부엌·안방·대청이 있고 꺾어져서 오른쪽에는 건넌방·부엌, 왼쪽에는 아랫방과 사랑뒷마루, 대문 옆으로는 광 ·책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 귀퉁이에 있는 ㄱ자형의 사랑채는 안채의 사랑뒷마루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덩어리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집은 화길옹주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이렇게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12.수석리토성
종 목 경기도기념물 제94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산2-2
시 대 삼국시대
수석리토성은 ‘토미제’라 부르는 한강 옆의 낮은 산꼭대기에 있는 토성으로, 한강을 건너는 나루를 지키기에 알맞은 곳에 있다.
이곳에서는 주위의 아차산, 이성산, 남한산, 천마산, 수락산과 마을 앞의 나루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세는 이곳이 성을 만들 당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요충지대임을 알게 한다.
반달모양의 성은 전체 둘레가 145m이며, 높이 4∼5m의 성벽은 흙을 다져 쌓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높은 곳을 깎아서 만들었다. 성안에는 봉화를 올렸던 장소로 짐작되는 곳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성을 쌓은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볼 때 수석리 토성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인 요충지로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올리는 통신기능을 지녔던 곳으로 추정된다.
13.정약용선생묘
종 목 경기도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이다.
16세에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후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흥미를 가졌다. 정조 13년(17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정조 16년(1792)에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옮겨진 후 순조 18년(1818)까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고향인 양주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하여『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데, 표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1쌍이 있다.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
14.흥선대원군묘
종 목 경기도기념물 제48호
지 정 일 1978.10.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
시 대 조선시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15.덕릉마을 산신각
종 목 경기도민속자료 제9호
지 정 일 1996.12.24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2리 산5
시 대 조선시대
산신각은 한국의 토속신인 산신 즉 산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과 절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덕릉 마을에 있는 이 산신각은 약 300여 평의 대지에 마련한 높직한 단 위에 건립되어 있다. 앞부분은 비어있고 뒷부분에 방이 있는 전당후실의 구조로,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사람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을 얹었으며, 양 옆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아 놓았다. 산신각 전체에는 책걸이·꽃·‘희(喜)’자 무늬 등을 새겨 화려하게 꾸몄으나,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후실 내부 정면에는 탱화풍의 산신도가 걸려 있는데, 화폭의 중앙에는 산신이 연꽃 모양의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왼쪽에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복숭아를 들고있는 낭자와 차를 끓이는 스님, 동자 2명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목재와 단청 및 장식이 다른 산신각에 비해 격식있게 건립된 것으로 보아 약 110년 이상 된 건물로 추정된다. 산신신앙·불교신앙·유교의례가 융화되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오던 민간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로, 지금도 매년 음력 1월과 10월 초하루 밤에 마을사람 중 1명을 뽑아 유교식으로 산신제를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한다.
(남양주시의 관광지)
1.다산 정약용선생 유적지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부락
다산정약용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다. 다산문화관에는 많은 저서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다산기념관에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초당의 축소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2.몽골문화촌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 250번지
경기도 남양주시의 천마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몽골문화촌은 1998년 남양주시와 몽골 울란바트라시가 체결한 우호협력 조약에 따라 만들어진 곳으로 몽골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 내에는 몽골의 전통의상과 악기, 생활용품 등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800여 점에 걸친 다양한 전시품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320여석의 관람석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몽골 문화예술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현재 19명으로 구성된 몽골 문화예술 당원들이 상주하며 공연을 펼치고 있는데 몽골 전통노래와 춤은 물론 악기연주, 기예, 줄서커스 등 다채로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은 하루 2회 이루어지며 국경일과 7.8월에는 하루 세차례에 걸쳐 공연이 이루어진다.
3.비금계곡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 (수동관광지 내)
비금계곡은 남양주시 수동면의 수동국민관광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계곡이다. 사방에 서리산, 주금산, 천마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 계곡은 울창한 숲 그늘이 드리워지고 맑은 물이 흘러 여름 피서지로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내방리에서 약 1.5km에 걸쳐 있는데, 아름다운 계곡과 함께 높이 540m의 시루봉 등산을 가볍게 즐길 수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수동면은 물골안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여 주변에 물골안유원지·수동계곡·검단이계곡 등 경치 좋은 계곡들이 줄지어 있는데, 검단이계곡 입구에서 비금계곡에 이르는 지역과 비금교 부근에 있는 너래바위 일대가 가장 경관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4.오남공룡체험전시관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134-1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에 위치한 오남공룡전시체험관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다채로운 공룡체험을 할 수 있다.개인 전시관으로는 최대 규모의 야외 공룡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실내에서 공룡시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오라마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각종 공룡화석, 공룡이름 맞추기 퀴즈 등 가족 모두가 함께 직접 만지고 보고 느끼고 만들 수 있으며, 아이들이 교감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으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준다. 또한 넓은 주차장과 식당, 매점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깨끗한 주변 환경으로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오남공룡체험전시관에서는 재미를 통해 자연스럽게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화석찾기, 공룡이름맞추기, 공룡색칠하기와 같이 공룡과 친숙해질 수 있는 기본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공룡풍선만들기, 지점토화석만들기, 공룡학습북 등 다양한 패키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5.남양주종합촬영소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산100
200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남양주종합촬영소는 크게 영상제작시설과 관람체험 시설로 나뉜다. 영상제작시설은 영화제작을 위한 세트 대여, 기자재 대여 및 녹음, 특수효과 작업등의 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아시아 최대의 영화촬영소이다.
또한, 관람객들에게 공개되는 관람체험시설은 오픈세트와 실내에 위치한 전시시설이 있으며, 이중 주목할 만한 시설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이 제작된 민속마을 세트와 2002년 가을에 개장한 영상 미니어쳐 체험전시관이 있다.
촬영소 전체를 관람시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이며 촬영현장은 야외세트 촬영만 공개 된다. 2002년 10월에 완공된 '춘사관'은 남양주종합촬영소를 이용하는 영화스탭과 영화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일반인의 휴식과 편의를 위한 시설로써 워크샵이나 세미나 개최 장소로도 이용할 수 있다.
6. 수동국민관광지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2리 211
남양주시 수동면의 송천리·운수리·입석리·수산리·비금리 일대는 그 지명이 말해주듯 한 폭의 그림같은 곳이다. 어디를 가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물골안'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금산과 서리산, 축령산에 둘러싸인 수동국민관광지는 울창한 숲과 깨끗한 계곡이 어우러져 여름철 피서지로는 제격이다.
특히 관리소에서 위쪽으로 1.5㎞쯤 올라간 구간은 바위가 많고 숲이 우거져 여름철에는 수많은 피서객들이 몰린다. 계곡 곳곳에 많은 유원지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향토음식점과 민박집들이 많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관광지는 1983년에 조성 되었으며 풍부한 산나물과 수십여종의 산과를 비롯, 버섯. 더덕. 고비. 도라지. 두릅 등의 토산품과 토종꿀. 밤. 잣 등이 이곳의 명물이다.
7.축령산자연휴양림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외방2리 산28번지
축령산은 남양주시와 가평군에 걸쳐있는 해발 886m의 산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아름다운 산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가 고려말 사냥을 왔다가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는데 몰이꾼이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고하여 산 정상에 올라 제를 지낸 후 멧돼지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고사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95년 7월 1일 문을 열어 현재 경기도에서 직영 관리하고 있는 휴양림으로 50년생 잣나무림이 잘 가꾸어져 있고, 축령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잣나무 산책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어 신비감마저 든다. 779ha의 넓은산림에 산림욕장, 체육시설, 물놀이장, 야영장, 자연관찰장 등이 있어 가족단위의 휴양공간으로 손색이 없으며 하루의 산행코스로도 적합한 곳이다.
주변에는 사계절 전천후로 이용가능한 천마산스키장, 풍부한 수량과 모래사장을 갖추고 있는 수동계곡 국민관광지가 있으며, 가는 도중 구한말 열국의 각축에 휘말려 뜻을 펴지 못한 채 망국의 비운을 겪은 조선조 마지막 두 왕과 왕비가 묻힌 금곡의 홍.유능(고종, 순종)에 들러 참배와 역사 탐방도 함께 할 수 있다.
- 문화재청 및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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