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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가풍·행동 양식 전수… 인문학 터전 문중학교 종학당의가치

은빛사연 2012. 1. 25. 10:50

명문가 가풍·행동 양식 전수… 인문학 터전
문중학교 ‘종학당’ 의 가치
▲종학당은 최근 들어 인문학의 장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조선조 500년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은 사족(士族)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엄격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도 강요됐다.

조선의 사대부는 평상시에는 호사를 누리며 백성 위에 군림하지만 나라의 대소사에서는 앞장서서 바로잡았다.

역사의 위기 때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도덕성으로 만인의 등대가 되는 것은 조선 명문가의 전형이다. 사회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울 때 통합의 역할을 해낸 것도 조선 사대부 가문이다. 국난과 혼란기야 말로 조선 사대부 가문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충청 기호유교의 적통인 파평 윤씨 가문은 빼어난 가풍(家風)과 행동양식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명재 윤증의 일대기에서 알 수 있듯 권력에 무관하게 덕행을 실천했으며 권력에서 벗어나 향토 공동체의 안위와 내실에 앞장섰다.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각별히 신경을 썼고, 서민들의 생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경계했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뼈 속 깊이 천착시킨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중 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의 역할이 컸다. 종학당은 종중 자녀 뿐만 아니라 문중의 내외척, 처가 자녀들까지 합숙시키며 엄격한 학칙(종약)과 체계적인 교과과정에 따라 교육했다. 당시 관학인 성균관과 대조를 이루는 사학(私學)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오늘날 초·중·고와 대학이 함께 있는 원스톱 캠퍼스에 비유될 정도다.

체계적인 커리큘럼은 10세 아이부터 과거를 보는 청소년까지 연령과 학문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췄다.

종학당의 탄생은 지나친 사교육 열풍에서 비롯됐다. 당시 공교육으로는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사립학교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지만 2% 부족한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처럼 상류층인 양반가는 대부분 스승을 두고 고액 과외를 했다. 논산의 파평 윤씨 가문은 이러한 사교육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설립했다. 교육의 토대를 놓은 이는 동토 윤순거였다. 동토는 학교를 건립하고 서책과 기물을 내놓았다. 종학당은 동토의 아우인 윤선거와 그의 아들인 명재 윤증이 차례로 학장에 오르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설립 이후 42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명재 가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가정에서도 위기 관리를 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가문 경영을 이룰수 없다는 점이다. 지속 가능 경영의 출발은 바로 교육을 통해 얼마나 ‘사회적 소통’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교육은 가문의 구성원들(내부)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소통은 이웃들(외부)에게는 베풂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돌볼 줄 아는 관대함을 뿌리내렸다.

명재 가문은 이를 통해 윤리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

종학당은 요즘도 문중 서당의 역할을 한다. 여름 방학이면 어김없이 집안 자제들이 종학당에서 몸가짐의 방법(持身), 글 읽는 방법(讀書), 일 처리(應事), 사람을 접하는 법(接物), 학문 하는 법(爲學之方圖) 등을 익힌다. 1박2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집안의 자부심을 몸에 익히는 소중한 경험은 다른 가문에 비할 바 아니다.

종학당은 최근 들어 인문학의 장으로 외연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고전번역원의 성백효 교수 등 4명의 교수가 직접 2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20일 동안 묵으면서 천자문과 동문선습,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배웠다.

명재 윤증의 종손인 윤완식씨는 “좀더 많은 문인과 학자, 학생들이 종학당에서 옛 선비들의 기상과 호연지기를 느껴보길 바란다”며 “논산시와 충남도 차원의 인문학 센터 건립과 프로그램 운영도 21세기 충청 기호유교를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일보 2011.5.25 기사(권성하기자)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