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진주/타산지석

방생(放生), 방생의 의미

은빛사연 2012. 4. 24. 18:41

 

불교의 계율은 청정한 삶을 유지하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입니다. 그 가운데 살생을 금지한 불살생계는 가장 중시되는 계율이며, 방생(放生)은 불살생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즉 살생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죽게 된 생명을 구해냄으로서 보다 넓은 의미의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살생계와 마찬가지로 방생은 불자가 임의대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하고 행해야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경전에는 “항상 방생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방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써서 죽게 된 짐승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방생 본래의 의미를 되새겨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공덕을 바라는 행위가 아니라 공덕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다른 생명을 구하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방생은 한갓 미물을 방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행하며 이를 널리 펴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중생에게서 고통의 여건들을 제거하여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방생이라 할 것이며, 또 참된 공덕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웃의 소외되고 억압받는 중생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인간 방생’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지켜나가고자 하는 불자가 수행해야 할 참 진리의 길이라 할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생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방생은 이러한 자각(自覺) 즉, 연기적(緣起的) 세계관(世界觀)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이란 모든 존재가 서로 존립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미암아 일어난다’ 라고 하는 연기(緣起)의 의미가 존재에 적용될 때 모든 존재는‘조건에 의존되어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다면 나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우주 만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거기에서 ‘나와 한 몸인 모든 존재에 대한 존귀함과 불해(不害)를 말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불살생과 자비의 구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아니겠습니까.

우주만물이 나를 지탱해주는 존재이기에 어느 것 하나라도 파괴되기 시작한다면 나의 존재도 마침내 파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래서 살생을 엄격히 금하고 방생을 적극 권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생명경시 풍토 속에서 방생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것입니다. 보다 넓은 마음에서 생명계를 사랑하는 정신이 있어야 나의 생명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모두가 다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적(緣起的) 세계관(世界觀) 위에 서는 것이며, 그렇게 했을 때 만생명과 함께 사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며, 방생(放生)의 공덕(功德) 또한 더욱 커질 것입니다.

 

예로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 3월 3일, 8월 보름에 방생법회를 열어 왔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특별한 시기를 정하지 않고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방생은 죽게 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인 것입니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죽이지 않고 보호하자는 의식입니다.

작게는 사람의 손에 걸려 죽게 된 고기나 새, 등을 사서 제 살던 곳으로 다시 놓아주는 것이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다시 말하지만 불살생계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는 것은 전생의 부모형제를 죽이는 것이고, 부처가 될 씨앗을 없애는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생의 반대인 방생의 공덕을 짓는 일은 결국 내 부모형제를 살리는 일이며, 나 자신의 거룩한 생명을 더욱 살리는 일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합니다. 아이엠에프 이후로 곳간이 비다 보니 세상인심이 더욱 각박해져 흉흉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팽배해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러한 각박해진 세상을 타개 하는 방법으로 방생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살생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죽이는 것만이 살생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기(氣)를 죽이고, 자신감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에게 냉소를 보내고, 자신감을 상실시켜 실망하게 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살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방생의 의미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속박되고 갇혀진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 해방시켜 주는 것, 타인의 닫힌 가슴을 두드려 열리게 하는 것, 용기를 샘솟게 해주는 것,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 에너지가 생기는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인간방생, 사람방생’ 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러한 방생의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불우한 우리의 이웃들을 향하여 회향되는 그런 법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훈훈하고 인정이 넘치는 활기찬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방생을 통해 ‘나다움’에 이르게 되고 그 ‘나다움’이란 인간 개성(個性)이 아닌 부처될 씨앗으로서의 불성(佛性)인 자성(自性)으로서의 ‘나다움’으로 승화(昇華)할 것입니다.

‘나다움’은 주체성의 확보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목표를 달성하게끔 하는 것이 ‘나다움’의 뿌리이고 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생(放生)’은 곧 ‘공생(共生)’이며 ‘상생(相生)’으로 이어지게 하는 부처님의 커다란 자비행(慈悲行)이 아니라할 수 없겠습니다.

‘절망하는 가슴에 희망을 싹트게 해주고,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일깨워 주고, 더불어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방생’이고, 이것이 바로 ‘공생’과 ‘상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공생’과 ‘상생’은 지역 이기주의, 진보와 보수, 계층간 양극화, 세대간 갈등, 등 작금의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커다란 방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방생’이라는 자기 방생을 통하여 아집과 아상, 편견과 삿된 욕심을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탈(解脫)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생의 삶을 살다보면 자기 자신도 찾을 수 있고, 공생과 상생의 길을 걷게 되어 물질만능주의 풍조가 팽배한 현대사회의 이기주의를 타개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봅니다.

 

 

이 글은 황금복쟁이님 블로그에서 내용이 좋아서 퍼온 글 입니다.

http://blog.daum.net/ok7930/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