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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관계

은빛사연 2009. 10. 11. 22:56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관계

일본은 수천 년간 언어.문자.정치.경제.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1853년 미국 페리제독 (M.C.Perry)의 개항 요구(黑船의 충격)를 전후하여 영국. 러시아.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서양문물의 거대함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국내적으로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극심한 대립이 이어진다. 이에 1868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오랫동안 핍박을 받아오던 하급 무사들은 메이지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하지만 이들이 일으킨 난은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내란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정국 수습책으로 300여 년 전 도요토미가 사용했던 정한론을 서서히 대두시킨다. 이리하여 힘(武)과 욕심(欲)으로 가득 찬 철학이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에 대해서는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침략적 태도로 일관하여 한반도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길로 걷게 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본디 천한 것이 돈을 모으게 되면 돈 자랑을 하고파 하고, 힘없는 자가 권력을 쥐면 권력의 달콤한 맛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가. 3류 사무라이들은 수천 년간 넘지 못할 산으로 여겨졌던 한반도에 대하여 구미의 '푸들(개)'을 자처하여 얻은 힘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모방의 천재 일본은 흑선의 충격(일본의 개항)과 똑같은 방법으로 한반도에 개항을 요구한다.

▲黑船의 충격(1853년 미국 페리제독(M.C.Perry)의 개항요구)

대원군이 하야하는 등 조선의 정황을 탐문한 일제는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개항을 강요했다. 그러나 개항이 거절당하자 일제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艦砲)시위를 벌였다. 또한 강화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재차 출동 시켜 조선 수비병들의 발포를 유도하는 사태를 촉발시켰다. 이 사태 이후 일본은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 병력 약 400명을 강화도 갑곶(甲串)에 불법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하는 생떼를 썼다. 이에 힘이 부족함을 느낀 조선 정부는 신헌(申櫶)을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이에 조선으로써는 최초의 불평등 조약 12개 항에 걸쳐 조인하게 된다. 이로써 한반도는 일본.청나라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강화도조약 체결로 국내는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로 양분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의 반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정부는 백성들의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여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마침내 1881년 일제의 조종을 받는 신식군대가 창설되자 구 군영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부족, 13개월 동안 군료(軍料) 미불 사태가 발생하여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임오년에

▲리콜라이 2세

구 군영소속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외 일본인 13명을 살해하였다. 또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등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혼란이 확대되어 황후 일파는 정치적 수세에 몰리게 되자 청나라에 난을 일으킨 군인들의 소탕 및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청국이 중재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청국정부는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고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한편 일제는 일본인 살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그 내용은 조선정부는 군란의 주모자를 처단하고, 일본인 사망자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이며,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이었다. 결국 군난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질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원인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永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 양반출신 청년 지식인들은 19세기 중엽 실학사상과 세계정세의 흐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개화사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 내에서도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어졌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나라는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 절반을 철수시켰다.
이에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을 축출하여 주도권을 가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는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를 내세워 조선 정권과 대립하고 있던 급진개화파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조선 침탈에 걸림돌이던 청나라와 명성황 일파를 내몰고 조선침략에 진일보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급진 개혁파에게

▲일본교관에 의거 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대

조선의 자주와 평화 보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웟다. 그리고 일본군대 동원과 이루지 못할 차관까지 약속하며 정변을 부추켰다. 혈기왕성한 급진개화파는 이러한 비열한 일제의 꾐에 속아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경,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무모한 거사를 감행했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황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갑신년 정변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0월 19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하였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는 개화파와의 약속은 고사하고 일본군인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급진개혁파 김옥균·박영효 ·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일제는 정변이 실패하자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전가시켰다. 이리하여 1885년 1월 9일 일제는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일본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강제 체결토록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청나라와 1885년 4월 18일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및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이 주 골자였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제는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0년 뒤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일제는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병하는 구실이 되었다.


1892년 방곡령(防穀令) 사건
1876년 조선이 일제에 의거 강제 개항되자 일본 상인들은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쌀·콩 등 농산물을 매점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조선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곡물이 계속 반출되자 곡물의 절대 비축량이 부족하여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88년(고종 25)에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되자 전국 여러 곳에서 연달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곡물 수출항인 원산(元山)을 관장하던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 제37관(款)을 근거로 원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동하였다.

91년 11월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는 방곡령 시행으로 일제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생떼를 쓰며 조선정부에 비해 보상을 요구하는 뻔뻔한 작태를 보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로부터 거절을 당하자 일제는 93년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배상금에 이자를 합산해 17만 5000환의 피해 배상을 강요하였다. 93년 4월 갖은 협박에 조선정부는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배상금 11만환을 지불하기로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일제는 1876년 조선에 대한 강제 불평등 개항 이후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농산물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 삼중으로 억압하였다. 또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을 도입하여 조선 연안에서 무역 및 세미(歲米) 운송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 및 탐관오리의 횡포는
▲전쟁승리를 그린 日淸戰爭圖繪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채택하고 궐기하기 시작했다.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동학혁명의 기세가 강대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며 6월초에 동학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일방적으로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강창일 배재대교수(제주4·3연구소장.17대 국회의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 민황후 정권의 반일 성향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낭인집단이 농민군을 지원하려 했다고 지적했듯이, 일제는 조선침략을 위하여 농민들을 부추기어 궐기하도록 하여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으며, 이를 빙자하여 출병을 감행하는 악랄한 이중성을 보였던 것이다.

서울에 군사를 배치시킨 일제는 조선정부에 대하여 청과의 관계 파기와 청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조선정부를 무력으로 억압했다. 그리고 일제는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에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렸다. 일명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29일에는 성환(成歡)에서 청나라 육군과 전투를 벌렸다. 9월에는 평양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승리한 일제는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계략을 세웠다. 10월에는 청국 영토로 진격하여 뤼순(旅順) 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하고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파함과 동시에 대만(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에게 연전 연패한 청나라는 95년 3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청나라와 일제가 벌인 ‘청일전쟁’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청과의 우월적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강탈하기 위한 진일보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은
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요동반도(遼東)· 팽호도(澎湖)의 할양과 대만(臺灣)을 식민지로 할양
 
③ 전후 배상금 2억냥 지불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광경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이다.
(전후 배상금 2억냥은 당시 청나라 국가 예산의 2배에 해당되는 엄청난 금액으로 일본은 영국 런던에서 3808만 파운드로 환산하여 수령했다. 일본은 그 배상금으로 야하타 제철소(八幡)를 비롯한 군수산업에 집중 투자하였다)

 

1895년 4월 삼국간섭(三國干涉)
당시 러시아는 1891년부터 장장 오천 오백 마일(9288Km) 대륙횡단 시베리아 철도(Trans-Siberian Railways)를 착공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여 부동항 확보와 대 아시아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일제가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남하정책에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하여 일제의 요동반도 진출에 제동을 건다. 이른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인 삼국간섭(三國干涉) 사건이다.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까지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결과가 되어, 이는 장래 극동의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인정하며… 중략… 일본정부에 권고하노니 요동반도에 대한 영유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는 공동 권고안이다. 이들 삼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일제는 요동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청일전쟁의

▲시베리아 철도 설치 계획 지도

승리에 들떠 있던 일제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명성황후는 이런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일찍이 가까운 일본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있던 차에 청일전쟁을 통해 나타난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의 잔악성과 위험성은 당장 발등에 불로 확인하였다.

일본과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가까운 일본 보다는 먼나라 서양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를 철저히 견제하려 했다. 이른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후는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와 친교를 갖는 등 일제 배척 의도를 표면화하였다. 명성황후의 이런한 정책은 삼국간섭으로 국제적으로 입지가 좁아졌던 일제로서는 절대 절며의 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명성황후가 달갑지 않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로서는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일제는 삼국간섭에 대한 부당성 및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구실로 미국과 영국에 접근하게 된다. 이리하여 조선에 대한 이용가치를 저울질한 미국과 영국은 일제의 손을 들어 주게 된다.

아무튼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싼 청.일.러시아를 비롯한 프랑스.독일 그리고 이를 견제하려는 미.영.일본 간에 급박하게 돌아갔던 국제 정세는'8개국 미니 세계대전' 의 전초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