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0.25 춘원 이광수, 납북도중 폐결핵으로 세상 떠남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1950년 10월 25일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춘원은 그의 호. 1917년에 그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무정'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한때 임시정부에 참가해 독립신문사 사장을 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해 1939년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고 본격적으로 친일행각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친일파로 비난받았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는데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북한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표작에 '흙', '유정', '사랑', '단종애사' 등이 있다.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한국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광수이다". 평론가 김현의 이같은 지적이 춘원의 문학과 생애를 잘 반영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소설로 꼽는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1월1일부터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다니면서 늘 학비에 쪼들리고 있던 춘원은 당시 매일신보 편집국장이며 그 자신 신파소설가이기도 했던 이상협의 전화청탁을 받고 구고인 단편 『영채』를 개작,『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춘원의 나이는 26세였다. 이 작품은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인 영어교사(이형식)를 주인공으로 구식 선비집안의 딸(박영채)과 신식 기독교 장로집안의 딸(김선형)이 벌이는 삼각관계가 줄거리지만,춘원은 이 작품에서 우리 민족이 선진문명을 배워 하루 속히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선구자적 이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무정』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이른바 「자유연애」는 당시 봉건적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는가 하면,여학생들은 여주인공 박영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었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어쨌든 매일신보는 이 작품을 연재함으로써 발행부수가 크게 신장되었고,춘원은 학비조달은 물론 문단에서의 위치마저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백철씨가 『계몽기의 신문학을 여기에 종합해 놓은 기념비적 작품』(『신문학사조사』)이라고 높이 평가한데 반해 조동일 교수는 『무정』이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장편소설이란 평가는 『구소설과의 관련을 살피지 못한데 기인한다』(『한국문학통사』4)고 지적하며 춘원의 소설은 대부분 저열한 흥미를 노린 통속소설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춘원이 우리 문학사에서 하나의 우뚝한 거목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춘원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연구문이면서 평전역할까지 하고 있는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머리말은 인상적이다. 『이광수,그는 고아였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 역시 고아의식에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춘원은 방황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변절도 했을 것이다. 그 기구한 운명의 춘원이 6·25때 납북된후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모습이 어제날짜 중앙일보에 보도되었다. 분단의 비극이 다시금 가슴을 에게 한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 1892-?)
189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한 이광수는 봉선사 운허스님의 6촌 형이다.
1902년 일찍히 일진회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길을 떠나는 것을 시초로 하여 1950년 7월 12일 북한군에게 납치되기까지 한국의 선구적인 시인, 소설가, 평론가, 언론인으로서 걔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문호이다.
그는 초년에는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갖었으나 중년 이후부터는 원각경을 즐기어 독송하면서 금강산 순례 중 보광암의 월하(月河)노사의 영향을 받아 법화경에 심취되면서 불교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 특히 그의 행보에 의문나는 점이 있다하여 변절자로 지탄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것이 동기가 되었는지 모르나 1944년에는 사릉(思陵)에다 초막을 장만하여 돌배개 등을 집필하면서 봉선사의 운허노사와의 교분이 잦았고, 1945년 광복이 되자 반민 특위에 회부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때 사능에서 봉선사로 거처를 옮겨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무르면서 불교신행에 힘쓰는 한편 1946년 운허스님의 주선으로 개교한 광동학교의 교편도 잡았고, 또 교가도 지었는데 이 교가가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이후 1950년 6.25사변이 나자 서울 자택에 잠시 갔다가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로 소식을 모르는 터에 1975년 주요한(朱耀翰)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그와 연고가 깊은 봉선사에다 기념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제의하여, 운허스님의 허락 아래 그의 기념비가 봉선사에 설치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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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 소설의 주춧돌격인 ‘무정’(1917)의 작가이자 2.8독립선언문의
집필자이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각료급이자 임정 대변지 ‘독립신문’
사장이고 동우회(흥사단)의 책임자였던 인물. 이광수(李光洙)의 아명은 보
경(寶鏡)이다. 초기에 사용한 필명이 고주(孤舟·외배)였고,중기 이후엔 장
백산인(長白山人)이라 하기도 했으나 춘원(春園)을 주로 사용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평양에서도 북쪽으로 2백여 리 떨어진 정주군,거기서도
40리 들어간 돌고지 마을이었다. 때는 조선왕조 건국 501년이자 고종 29년
이며,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892년이었다. 아버지
이종원(李鍾元)은 15세에 첫 장가를들어 3년만에 상처했고,두번째로 맞은
이도 딸 하나 낳고 죽었다. 무당 딸로 추정되는 생모는 그러니까 삼취에 해
당된다. 부 42세,모 22세에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아래로는 두 누이가 있었
는데 그 중 하나만 살아남아 훗날 중국 쪽으로 시집갔다.
“우리 어머니가 내게 끼친 도덕적 영향은 별로 없다”는 회고에서 보듯
그는 매우 가난하고도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더욱 딱한 것은 돌림병으로
말미암아 그 부모가 거의 동시에 죽었다는 점이다. 그의 나이 열한 살 적
이었다.
동가식 서가숙하던 이 천애고아를 거둔 이가 바로 동학의 박찬명(朴贊明)
대령이었다. 박찬명 대령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실천자답게 이 고아를
입히고 먹이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비서로 삼기까지 했다.‘무정’의 주인
공 박영채의 부인 박진사의 모델도 이때의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동학이 파견한 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것이 1905년이었는데,당시 동
학 교주 손병희는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그러나 동학의 정책 착오로 말미
암아 이용구의 배반 사건이 일어나 마침내 동학이 천도교로 전환하는 과정
에서 춘원은 귀국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학비 문
제가 해결돼 두번째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션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보통
부에 입학해 학업을 마친 때가 1910년이었다.
춘원의 재능은 처녀작이자 일본어로 쓴 단편 ‘사랑인가’(1909)에서부터
드러났다. 그는 귀국 후 곧바로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 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부임해 백혜순과 결혼,아들을 얻고 상하이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한
후 1914년에 귀국했다. 호남 지주 김성수의 도움으로 제3차 도일,와세다 대
학(早稻田大學) 철학과에서 공부하던 중 ‘무정’을 쓰고 의학 전공의 유학
생 허영숙과 연애에 빠져 베이징(北京)으로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한 인간의 생애를 양분할 수 있다면 여기까지가 춘원 이광수의 전반부라
할 것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임시정부의 각료가 되었다는 것,‘무정’의 작
가이자 동우회 조직자이며 ‘민족개조론’ 집필 등으로 요약되는 춘원의 삶
의 전반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민족의 발견’이다.
세상엔 ‘개인’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춘원에게 가르쳐 준
것은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지대도대덕(保國安
民之大道大德)을 이념으로 하는 동학이다.‘무정’,‘개척자’(1919),‘흙
’(1932),‘사랑’(1938) 등의 소설들을 두고도 문학여기론(文學餘技論)을
거침없이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생각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그의 의식,무의식 속엔 본기(本技)가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그것
이 동우회(흥사단)로 나아간 추동력이다. 이러한 생각의 실천 방법을 가르
쳐 준 사람은 ‘삼전론(三戰論)’의 손병희이다. 소위 약육강식을 기본율법
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든 한국 민족이 살아남는 방도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손병희의 경륜은 사람의 싸움,말의 싸움(言戰),재물의 싸
움이었다. 춘원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쪽이 말의 싸움,곧 언론계의 활동이
었다. 훗날 춘원이 민족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4설(사설·社說,횡설수
설,소설,논설) 등을 가리지 않고 거의 동시에 집필한 것에서도 이 점이 새
삼 확인된다.
이 천애고아에 있어 주어진 무기란 오직 글쓰기뿐이었다.“붓 한 자루/나
와 일생을 같이 하련다”(1925)라는 목소리가 이 사정을 잘 말해 준다. 그
렇다면 과연 이 붓 한 자루란 무엇이었고,어떤 방식으로 춘원 고유의 몫을
했으며,그것이 어째서 “개인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명제에도 합
당한 것이었을까.
이 물음에는 많은 설명이 주어져야 한다. 근대에 대한 인식도 그 중의 하
나가 될 수 있다.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을 기본항으로 하는 근대란 이른
바 국민주의(내셔널리즘)를 낳았고,그것의 다른 대외적 명칭이 제국주의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작용 요소가 이른바 국
어(국가어)와 이에 관련된 출판물이다. 왜냐면 국민국가란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인 까닭이다. 지역적,계층적,정서적 차이를 국민국가라는 단일한 공
동체로 인식케 하기 위해서는 이런 갖가지 차이를 균질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수단으로 가장 유력한 것이 국어(언문일치)이자 이를 보급하는
출판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비(非)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신문관
을 창설하여 출판물 왕국을 세우고자 한 육당의 경우라든지 ‘독립신문’(1
896),‘제국신문’(1898)등의 역할도 이로써 설명된다. 이러한 균질화를 내
면화한 것이 이른바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런저런 행위들이 서로 연결
되지 않더라도 익명의 독자 앞에서 숨김없이 노출되게끔 마련된 장치가 바
로 소설인 것이다.
여기 한 편의 소설이 있다고 치자.A에겐 처 B와 애인 C가 있고,C에겐 정부
D가 있다. A와 B가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C와 D는 정사를 한다. A가 C에
게 말을 걸고 있을 때 B는 물건을 사고 D는 공을 치고 있다. D가 술집에 있
을 때 A는 B와 집에서 식사를 하고 C는 꿈을 꾼다. 이 네 명은 사건과 시간
의 연쇄 속에 놓여 있는데 A와 D는 만난 적이 없다. C가 제대로 한다면 A와
D는 만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A와 D를 관계짓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기능이 거기 작동하고 있는데,상호보완성이 그것이다. A와 D가
서로 알지 못하더라도 독자들이 그 관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어째서 국
민국가가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가와 등가를 이룬다(B 앤더슨의 ‘상
상의 공동체’ 참조).
‘무정’의 작가로서 춘원의 존재가 상징적인 것은 이처럼 근대를 경험하
는 과정에 놓인 소설(문학)의 의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단순한 ‘말의
싸움’이란 개념보다 훨씬 내밀한 글쓰기의 본질에 관련되는 사항이기에,이
는 춘원의 개인적 재능을 초월하는 영역이 아닐 수없다.
여기까지가 춘원 생애의 전반부가 지닌 삶과 글쓰기의 의미라면 후반부의
그것은 어떠할까. 이 물음에 대한 설명의 하나로 춘원을 국민국가의 상실
속에 놓고 바라보는 방법이 있다. 국민국가와 자본재 생산양식의 동시적 수
행과정이 근대라면,그리고 이를 보편성이라 한다면,비서구인 우리의 경우
특수한 역사 수행 과정이 가로놓이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반제 투쟁과 반
봉건 투쟁이다.
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모순성의 한가운데에 춘원이 우뚝 서 있는 형국
이라 할 것이다. 이 상호모순성을 초극해 나갈 수 있는 방도가 규범적 수준
에서 과연 있을 수 있었을까. 그 방도를 찾기위해 그는 그야말로 헤맴과 곡
예를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 방도를 가르쳐 주지 않
았고,또 가르쳐 줄 수도 없다고 스스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전
반부의 삶이 낳은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전반부를 구성한 오른팔이
도산(島山)이었다면 왼팔은 총독의 언론 고문이었던 아베 요시이에(阿部充
家)였다. 이 두사람 덕분에 삶의 전반기에 그는 방황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
이다. 그러나 아베의 죽음(1936),도산의 죽음(1938) 이후 그는 돌연 고아의
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우회 사건(1938)으로 인한 복역,조
선문인협회 회장 출마,육당과 더불어 학병 권유(1943)등을 거쳐 노골적인
친일문학으로 치달은 것은 그 혼자의 결단 행위라 할 것이다.
‘무정’의 작가이고 임시정부의 각료이자 그 이념의 표상인 ‘독립신문’
사장인 춘원과 정반대의 춘원이 마주치는 모순된 장면이 우리 근대사 앞에
알몸으로 드러난 형국이었다. 만일 이 모순성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
이 있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글쓰기로서의 문학(소설)이 그 해답의 하나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경우
문학이란 그의 생애 전부에서 큰 힘을 발휘한 계몽주의와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후반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적인 것과도 관련이 없는 그 무엇. 그러
니까 그만이 관련된 과제로서의 문학,곧 외로움,고아의식에로의 회귀에 다
름 아닐 터이다. 민족도 이데올로기도 이 천애고아에겐 아비 찾기의 심리적
보상행위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 본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조언을 해줄 수 없기에 그 역시 누구에게도 조언을 할 수 없
는 곳,거기에 그만의 글쓰기로서의 문학이 있었다. “대청광서(大淸光緖)에
낳고/명치대정(明治大正)의 거상 입고,천조소화(天照昭和)에 절한 더러운
몸”이라 자처한 것과는 다른 목소리,그는 그것을 ‘꿈’(1950)이라 불렀다
그가 반민특위에 육당과 더불어 수감된 것은 1949년 2월 7일,병보석으로
출감된 것은 같은해 3월 4일,불기소 처분을 받은 것은 8월 29일이었다. 검
찰관 9명 중 4 대5로 불기소 처분이 결정됐다. 1950년 7월 12일 납북,그리
고 같은해 10월 25일 사망. 자강도 강계 만포면 고개동에서였다. 북한측은
원세훈,명제세,김약수 등 납북 인사와 더불어 평양 근교의 공동묘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춘원 이광수,그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이 나라 근대사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이 낳은 모순성 속의 글쓰기란 무엇인가에로 다시 이어질 성질의 것
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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