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신 장군
윤흥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막다 순국한 장군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후 여러 갈래로 전진하는데 그 중 한 갈래가 다대포진과 동래부를 공격합니다. 다대첨사(첨사는 진을 지키는 우두머리) 윤흥신은 동생, 백성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결국은 운명. 그 후 1765년 영조 때 이 곳 다대첨사로 온 이해문이 윤흥신 그리고 일본군과 싸운 백성들을 기리기 위해 '윤공단'이라는 제단을 만들고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윤흥신(尹興信) 공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事蹟)이 천양(闡揚)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관해 기록된 조엄(趙嚴)의 윤공유사(尹公遺事)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 징비록(徵毖錄)을 보니 다대진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고 하였고, 또 재조번방지(再造蕃邦志)에는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키니 다대진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는데 징비록은 선조(宣祖) 조의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찬술한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인 신경(申炅)이 찬술한 바라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하였을 것이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임진란 후 160년을 지난 정축(丁丑); 1757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동래부사가 되어 도임한 이튿날에 충렬사를 참배하였는데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공과 부산진첨사 정공만이 제향되고, 다대진첨사 윤공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부산지역에서 전사하였는데 어찌하여 송·정 양공(兩 公)만 한묘(廟)에 향사되고, 심지어 향리와 노비까지도 전사한 자는 함께 향사되었는데, 윤공만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던가 하고 심히 의심스러워서 읍지(邑誌)를 상고하고, 다대포에 가서 물어 보아도 세월이 지나고 전문(傳聞)이 끊어져 후예들도 알지 못하고, 후인이 천발(薦拔)하는 일도 없으니 당시의 윤공의 의열(義烈)이 드러나지 않게 됨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사년(辛巳年)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도내의 효열(孝烈), 절의(節義)를 표창하는데 윤공의 일도 그 한 가지였다. 예부에서 증직할 것을 정부에 올리고 정부에서 다시 상주하여 조만간 그 하회가 있을 것이나 마음속에 석연치 않은 것은 역시 윤공의 사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근자에 문득 구사맹(具思孟)의 조망록(繰亡錄)을 얻어 보았는데 그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첨사 윤흥신을 특서하고 주(註)하여 말하기를 왜적이 성을 포위함에 힘써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 부하가 말하기를 「내일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우선 나가 피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니 흥신이 말하기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어찌 차마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적이 과연 크게 이르니 군졸이 모두 도망갔다. 홀로 종일토록 적을 쏘아 죽이다가 성이 함락됨에 이에 죽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가지고도 충렬사에 합향(合享)되지 않는다면 충혼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후세 사람을 무엇으로 권장하리오』
조엄이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윤흥신의 사적은 오래도록 드러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의 윤공사절기(尹公死節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충렬비(남문 앞에 세워져 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는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썼다.)를 읽고 윤공이 실려 있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고, 충렬사를 참배하고는 윤공이 참여되지 않았음을 슬퍼하였다. 그 유적을 방문하여도 이미 세월이 오래되어 그 자취를 살필 길이 없고, 지방 노인들에게 물어 보아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금년 봄에 내가 금정산 범어사에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국조전망인시식책자(國朝戰亡人施食冊子)를 보니 다대포첨사 윤공의 이름이 송·정 양공의 이름밑에 크게 씌어 있었다. 공의 정충(貞忠)으로 유사(遺祠)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만 절간의 시식을 받게 되니 이 어찌 사림(士林)의 향모(向慕)하는 뜻이 산승(山僧)의 숭모함만 같지 못하리오』
윤흥신의 순절 사적은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조번방지와 구사맹의 조망록, 범어사의 시식책자 등에 그 이름과 사적의 일부가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다대포에서 4월 14일에는 성을 지켰으나, 15일에 다시 밀려온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임진란 후 1백70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윤흥신의 사적은 오랫 동안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다가 조엄, 강필리 등에 의해서 발현되고, 영조 임진 2월에 와서 비로소 충렬사에 제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약전(略傳)도 세우기 어렵다.
다만 그는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때 화를 당한 윤임(尹任)의 아들이라는 것 만 기록 되어 있다.
사진 참고
윤공단, |
종 목 | 시도기념물 제9호 (사하구) | |
명 칭 | 윤공단(尹公壇) |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 |
수량/면적 | 12,890㎡ | |
지 정 일 | 1972.06.26 | |
소 재 지 | 부산 사하구 다대동 산24 | |
시 대 | 조선시대 | |
소 유 자 | 부산시 | |
관 리 자 | 사하구 | |
상 세 문 의 | 부산광역시 사하구 문화공보과 051-220-408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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