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의 다대성싸움과 윤흥신첨사' 관련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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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의 다대성싸움과 윤흥신첨사” 관련 토론회 개최
우리 사하지역의 역사적 인물인 『다대첨사 윤흥신장군과 임진왜란을 재조명』하는 토론회를 개최하오니 관심있는 지역주민의 많은 참석바랍니다.
○ 일 시 : 2007. 3. 28(수) 15:00~ 17:00
○ 장 소 : 사하구청(본관4층 대회의실)
○ 주 제 : 임진왜란 초기의 다대성싸움과
○ 인 원 : 500여명(예정)
○ 주 최 : (사)목요학술회, 다대문화연구회
○ 후 원 : 사하구
○ 진행순서
- 식전행사(15:00 ~ 15:30)
- 토 론 회 (15:30 ~ 17:00)
▷ 사 회 : 서세욱 회장(부산을 가꾸는 모임).
▷ 발 표 : 한건회장(다대문화재연구회).
▷ 토 론 : 김재승박사(한국해양대 겸임교수).
장학근 박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책임연구원)
최해군 선생(소설가, 향토사학가)
황일준 부구청장(사하구)
향토사학자 "임란 첫 전승지는 부산 다대포"
"임진왜란 첫 승리는 부산 다대성전투이고 주인공은 다대포첨사 윤흥신장군이다"
한건 다대문화연구회장은 28일 부산 사하구청에서 열린 '임란 초기의 다대성 싸움과 윤흥신 첨사'라는 제목의 학술토론회에서 "다대성 전투가 벌어진 다대포 일대가 사실상 임진왜란 첫 전승지임에도 윤흥신 장군과 다대포 민중의 역사적인 전투기록이 소실됐다"고 말했다.
향토사학자인 한 회장은 임진왜란 당시 첫 승전이 1592년 5월7일(이하 음력)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이 아니라 4월13일 다대포 첨사 윤흥신 장군이 이끈 다대성 전투라고 주장했다.
한 회장은 "'윤공단 비문'에 임진왜란의 첫 전투일이었던 4월13일 다대첨사 윤흥신이 왜적을 물리쳐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돼 있으며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과 구사맹의 '조망록'에도 임진왜란이 4월13일 발발했으며 윤흥신 장군이 이끈 다대성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일본측 사료에서 임진왜란 개전일을 4월14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패한 4월13일 다대성 싸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회장의 주장대로 임진왜란의 첫 승전이 발발 당일 다대포에서 있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승전 전까지 속수무책으로 왜군에 연패를 당했다'는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 회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열악한 조건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영웅적인 지휘관과 백성들의 존재가 부산 다대포에 있었고, 이들이 왜군의 진로를 막았었다는 부분은 분명히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 사하구청은 이 같은 주장을 근거로 국사편찬위원회와 부산시시사편찬위원회에 정식으로 고증을 의뢰하는 한편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는 윤흥신 장군 동상을 사하구 다대동으로 옮길 예정이다.
윤흥신 장군은 형조판서를 지낸 윤임의 다섯째 아들로 을사사화에 윤임이 연루되면서 큰 고통을 당했으나 무과에 합격, 종6품 진천 현감과 종3품 다대포 첨사 등을 지냈으며 다대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 장군의 위패는 정발 장군, 송상현 부사와 함께 부산 충렬사에 있으며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공을 기리는 비석과 제단이 설치된 '윤공단'이 있다. (2007. 3. 28. 국제신문, 매일경제, 연합뉴스 / 오수희 기자)
임란초기의 다대성싸움과 윤흥신 첨사
- 전투일 오류와 향사에 대한 문제제기
(사)목요학술회와 다대문화연구회가 공동주최하고, 사하구청이 후원한 ‘임란초기의 다대성싸움과 윤흥신 첨사 역사토론회’가 지난 3월 28일 오후3시 사하구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목요학술회 김성환 회장은 개회사에서 “임진왜란은 우리역사에서 뼈아픈 실수였고, 참혹한 대가를 치른 수치스러운 역사였음을 되새기면서 이번 토론회를 통하여 임란초기의 오류의 역사를 바로잡아 윤흥신 장군의 공적이 재조명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조정화 사하구청장은 축사에서 “윤흥신 장군과 임진왜란 당시 다대성싸움의 재조명이 지역문화와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하자고”고 격려했다. 다음은 주제 발표자와 토론자들의 토론요지다.
한건(다대문화연구회장)
오늘 토론회에서 주제가 되는 임진왜란의 정확한 발발 일자를 밝혀보자는 뜻은 이를 통해 부산성 싸움의 시기와 진실을 알아내고, 나아가 임진왜란의 첫 승전과 이틀에 걸쳐 전투가 진행되었다는 다대성 싸움에서 이전투를 지휘한 윤흥신 첨사의 공적을 확인 재조명 하고자 한다. 현재 다대포 주산 내에 조성되어 있는 윤흥신 첨사를 기리기 위한 윤공단의 첨사윤흥신공순절비(僉使 尹興信公 殉節碑)비문 내용을 보면 공은 부산 첨사 정발공과 같은 날 전사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있다. 비문은 조선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진관(1739~1808)이 지은 것으로 비문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 내용이다.
“始倭陷釜山 分兵圍多大 公力却之 軍吏進曰 賊必悉至 莫如避 公叱曰 有死而己 明日賊大集 軍遂潰 公獨終日射賊 賊城陷死之 “
그 내용을 풀이해 보면,
“처음 왜적이 몰려와 먼저 부산성을 함락한 다음 군사를 나누어 다대성을 포위하였으나 공은 첫날전투에서 왜군을 물리 쳤고 결국 다음날 다시 전투가 시작되어 공은 종일토록 전투를 거듭하였으나 군대가 무너지고 성이 함락될 때 같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부산시가 주관하는(동구청 시행) 정발공을 기리는 정공단제사가 윤흥신공과 같은 날인 음력 4월 14일에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부산첨사 정발공이 1592년 임진년 4월 14일에 전사하여 그 제사일이 지금 동구청이 시행하고 있는 대로 4월 14일이 맞는다면 다대첨사의 제사일은 순절비 기록에 근거하여 4월 15일이어야 하고, 따라서 임진왜란 발발일은 4월 14일이 되며, 그 반대로 다대포에서 지내고 있는대로 윤흥신 다대첨사가 4월 14일 전사하여 그 제사일이 4월 14일이 되었다면 부산첨사 정발공의 제사는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일은 4월 13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오늘 토론의 정점이 될 임진왜란의 발발일이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이냐 14일이냐 하는 불분명한데서 그 원인이 있고 앞으로 이 내용은 여기계신 임진왜란과 윤공단에 대한 전문가이신 토론자 여러분께서 근거를 들어 정확히 밝혀내겠지만 임진왜란 발발에 대한 대개를 3가지로 분류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진왜란은 4월 13일에 발발하였고 부산성은 4월 13일에 함락되었으며 부산첨사 정발은 손도 못써보고 당일 전사했다.
징비록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임진왜란의 발발일자가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이어서 실록의 발발일자 4월 14일과 하루 차이가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四月十三日 倭兵犯境 陷釜山浦 僉使鄭發死
是曰 倭船自對馬島蔽海而來 望之不見基際”
즉, 4월 13일 왜병 침범, 부산포 함락되고 첨사 정발 죽었다. 이날(13일) 왜선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오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釜山僉使鄭發出獵絶影島 狼狽入城
倭 兵隨至登陸 四面雲集 不移時 城陷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수렵 나가 있다가 허둥지둥 성에 돌아왔으나 뒤따라 왜군이 상륙하여 사면에서 구름같이 달려드니 부산성은 손도 꼼작 못해보고 함락당했다.
2. 임진왜란은 4월 14일에 발발했고 부산성은 4월 14일에 함락 되었으며 부산첨사 정발은 항전을 하다가 성이 함락 될 때 같이 전사했다.
선조보감 제8권 (수정실록 4월)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是月十三日 乘曉霧渡海 釜山僉使鄭發 鑿沈
蹟船 盡卒兵民守堞 翌曉 賊圍城百? 乘西城
外高處 發砲如雨 撥守西門 拒戰良久 賊衆中
矢 死者甚衆 撥矢盡中丸 城遂陷”
이를 해석하면 4월 13일 정발은 절영도에서 수렵 중 왜적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성으로 돌아와 전선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선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전부 가라앉히고 성의 방비에 들어갔고 14일 아침부터 오랫동안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광해군을 거쳐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식(李植 1584-1647)의 야사초본내용과 같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왜군이 쳐들어오기는 4월 13일이나 부산성전투는 4월 14일 새벽부터 시작 되었으며 부산 첨사 정발은 항전을 계속하다가 14일 늦게 전사했다.
다음은 일본측의 기록을 우리의 기록과 대조해 보므로써 역사기록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문록경장의 역은 임진?정유왜란의 일본식 이름이며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879-1951)가 펴낸 책으로 그 중 1936년에 펴낸 별편 제1권에는 임진왜란의 경과를 조선의 기록과 일본기록을 비교대조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문요약>
우리군(왜군)이 쳐들어간 날 부산첨사 정발의 행적은 송시열의 비문과 효종말년 동래부사 민정중의 유문(임진유문)에서 “휘하의 군함3척을 통솔하여 부산포 앞 바다에서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성룡의 징비록, 박동량의 비태소록, 이식의 야사초본에서는 영도에 수렵을 나가 전혀 준비가 없었음을 밝히고 있고 원균의 제1보를 받은 이순신은 그의 장계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必是歲遣船<對馬 貿易>而九十餘隻之
數多出來 莫測基由連續出來<似非尋常>
즉, 필시 세견선(대마의 무역선) 그것이 90여척이나 수가 많이 온다는 것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고 또 연속으로 온다는 것은 심상치가 않다.
我が軍の侵入の侵李に寢耳なりしは殆んど疑ひなし鄭發が釜山鎭の三艦を領して捕上に戰へらといふは必ず事實にあらず.
우리군(왜군)이 침입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는 것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발이 부산진 휘하의 군함 세척을 통솔하여 포 앞바다에서 싸웠다는 기술은 반드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부산성 중심의 임진왜란 전투시기가 4월 14일이 정설이 되고 보니 같은 날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13일인지 14일인지 날짜를 잘 모르는 다대성 전투는 역사에서 빠지게 되었고, 조선유일의 수군 전문무장고을의 수장이었던 윤흥신 다대첨사는 그 직급이 동래부사와 같은 정3품 당상관이었음에도 기록이 없다보니 그 공적 또한 잊혀져 버렸다.
그 러나 첨사 사후 172년 만에 조엄에 의하여 다대성전투와 첨사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공의 순절비 비문에서 밝혔듯이 당시 관리들의 비협조와 다대포 사람들의 무지로 다시 잊혀졌고 그리고 다시 76년이 흘러 첨사가 돌아가신지 248년만에 순전히 풍양 조씨 3대의 노력으로 윤공단이 조성되고 순절비가 세워졌지만 4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첨사는 아직 그 직위와 공적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사일도 14일인지 15일인지 불분명한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점에 대해서도 앞으로 이 충신 절충장군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토론을 통한 의견 개진이 있었으면 한다.
장학근(국방부 군사편찬위 책임연구원)
이 문제의 핵심이 부산진전투와 다대포전투가 같은 날이냐 아니냐 그것이 해결되면 제사날은 해결된다고 본다. 당시 전쟁상황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측 자료인 선조실록마저도 수정실록과 차이도 있고, 문집에도 차이가 있다. 일본측 기록을 봐도 맞지 않고 그래서 제3자의 기록인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30년 남짓 일본에 체류하면서 기록한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서행장을 따라 종교적인 상황을 일본의 본부에 보고한 내용을 포르투갈에 가서 일본사를 정립한 내용을 소개하고자한다. 진주박물관에서 번역한 것이 있어서 이 내용이 오늘 토론내용과 밀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1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오는데, 당시 부산포는 병사가 6백여명 정도 있었고, 성안에는 3백채의 민가가 있었다. 1592년 4월 12일(일본의 음력이 하루빠름. 우리는 4월 13일) 일본군 제1진이 부산에 도착하여 이날 밤 절영도에 머물면서 소요토시는 조선측에 파견하여 협상을 하도록했다.
일본군이 쳐들어 올테니 항복해라 이때 우리측에서는 웃으면서 국왕에게 물어볼테니 기다려달라고 답신을 하였다.(이것은 임란 5년전부터 일본사신들은 왜관에 와서 우리관리들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고 했다. 우리측은 그것이 만성이 되어서 장난인줄 알고 웃으면서 대답을 하곤했다고 한다.)
그때 고니시는 회담을 기다리는 척하면서 밤새도록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다음날(14일) 새벽 3시와 4시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다대포전투는 하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대단히 고전하면서 성안에서는 두 번에 걸쳐 양쪽이 부딪히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우리나라 기록에는 정발이 사냥을 갔다와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용감한 전사이며 그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고, 포로가 된 사람은 소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여인들은 매우 정숙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조심성이 많다는 정평이 있으나 그들 가운데는 이 예기치 못한 엄청난 재난에 직면하여 눈물로 범벅이 되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투항하는 여인도 있었다.” “귀하고 용모가 단정한 남녀 아이들은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일부는 발을 절뚝거리면서 절름발이 행세를 하였고, 어떤 아이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입에 경련을 일으켜 보였으나 이내 속임수임을 눈치챈 일본인들은 그들을 계속하여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들은 전투를 아침에 하고 부상자치료와 식량보급을 위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고 다음날 그곳을 출발하였다. 음력 4월 14일에는 동래성으로 출발하였다. 최대의 방어진지로 간주하여 2만명의 병사가 집결해 있었다.
이 전투에는 매일 일본의 신병들이 집결했는데 그 병력의 수가 3만명 가까이 되었다. 음력 4월 14일(우리 음력 15일) 저녁 성채를 공격했다.
조선군은 5,000명 전사, 일본군은 100여명 전사 400여명 부상, 이 전투에서 동래성 송상현 장군이 전사하고, 일본군은 16~17일 이틀간 머물렀다.
1진 고니시는 다대포 전투를 하지 않았다. 경주에 있는 일본군이 다대포를 공략했다. 부산포와 다대포 전투는 상당한 간격이 있다.
4월 13일 오전 부산포전투, 4월 15일 오후 동래성전투가 있었고, 16~17일은 쉬었고 18일은 밀양, 양산, 청도, 대구로 북진했다.
그러면 다대포 전투의 날짜는 언제인가? 후방의 불안을 제거하기위해 일부의 군대를 내어 다대포 전투를 치르게 했다. 고니시와는 관계없는 군대인 가등청정이 부산 왼쪽에 있는 교운포, 서생포, 다대포를 함락시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재승(한국해양대 겸임교수)
오늘 발제에 나타난 이 문제는 이제까지 한국사학계에서 명확한 결론이 없었던 주제중의 하나다. 문제는 부산포전투의 개전일자를 두고 학계의 두가지 시각이 공존한다는 것과 일본의 음력과 조선의 음력은 하루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 혼란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제에 의한 토론은 한국의 사학계에서 광대한 심포지엄으로 결론을 내려주어야 제사 날짜를 바로 할 수 있다.
제가 찾은 신빙성 있는 자료로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대마도주 종의지를 따라 종군을 해왔던 승려 천영이 쓴 서정일기에 의하면 4월 13일 일단 아침 8시에 대마도 북단을 400척이 출발 영도까지 도착한 것이 오후6시로 이 중 100여명이 정탐을 했다.
이것을 전쟁행위로 볼 수 있느냐. 그 다음 14일날 새벽부터 전투를 시작해 정발장군이 전사한 시간이 12시경이다. 그 다음날 일부가 다대포 간걸로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4월 14일이냐 15일이냐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학계의 3가지 학설 어느 하나 명확하게 학술적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학술발표의 의미는 한국사학계에 숙제를 하나 던진 의미다. 만약 비문의 내용대로 정발장군이 14일 전사했다면 윤장군은 전사가 15일이 맞지 않겠냐는 게 개인적 견해이다.
최해군(향토사학가)
실상 임란에 대해 가장 깊이 알고, 어려움을 겪은 부산에서 가장 연구가 안되어 있다. 165년 후에야 밝혀졌다. 그 동안의 윤공의 다대포전투는 영 드러나지 않았다. 고시니쪽으로 하나의 방향을 잡아놓으니, 다대포는 미아가 되어있다.
당시 다대포가 옥쇄되어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전할 사람마저 없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싸움이 치열했다는 반증이다. 이런저런 기록을 상식적으로 종합하면 일본이 13일에 부산에 온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전쟁이 목적인데 가장 요긴한 다대포를 놔두고 올라갈 일이 없다.
절영도까지 왔다고 하면 부산포, 다대포를 놔두고 갈일이 없다. 부산과 다대포는 같은 날에 전쟁을 했다. 부산진에서는 13일 늦게 탐정을 왔고 그 다음날 14일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틀을 싸웠다는 것은 정찰하러왔던 군사가 되돌아가 다음날 와서 다시 싸웠다는 것이다. 왜관이 있었고, 다대포에 군사가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동래를 칠 때는 세 방향의 군사가 왔다하니까 다대포를 치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같은 날 부산진과 다대포진이 습격을 당했다. 그래서 발발일자를 14일로 봐야할 것이다. 다대진이 참혹하게 당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황일준(사하구부구청장)
사하구는 삼포지향의 도시로 발전하는데 비해 문화와 역사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한 것 같다. 이번 토론회가 윤흥신 장군의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내고장의 역사, 문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동구 고관입구에 윤흥신 공의 석상이 있는데, 당상관으로서 정3품의 벼슬이라는 것을 해군사관학교의 이민웅 박사에게 고증을 받은 적 있다. 윤흥신 공은 임란당시 임지를 지키고 조선장수의 명예를 드높인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장수다. 이러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현재화하여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따라서 동구에 있는 윤흥신공 석상을 사하구로 이전해 뜻을 기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상현, 정발장군은 지자체에서 향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윤흥신 공의 향사도 주민자치단체와 협의하여 사하구 차원에서 주관하도록 노력하겠다. (2007. 4. 1. 시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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