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의 궁궐 왕릉을 찾았다.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그 왕비가 계신 곳, 남양주의 홍유릉이다
왕왕릉 (王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 왕릉은 단순히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부터 당대의 건축양식과 미의식,
생태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다.
"이곳이 바로 신(神)의 정원이군요!”
조선의 왕릉을 둘러본 유럽 정원건축가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광무 원년(1897)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홍릉 비각에는 '대한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大韓 高宗太皇帝 洪陵 明成太皇后 祔左)'라고 적혀 있었다.
이 비각을 세운 능참봉 고영근은 1903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방조범인 우범선을 일본 히로시마까지 찾아가 목에 비수를 꽂은 인물이다.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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