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 비에서 몇 십 메터를 걸어 내려가니 그제야 청령포가 보입니다. 淸玲浦란 이름에 "물가"를 의미하는 浦 자가 들어간다는 것을 의아해 하던 저는 아래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이건 정말 쇼킹한 광경이었습니다. 사진의 섬처럼 보이는 곳이 청령포라니??? 영월도 심산유곡에 자리한 곳인데, 세조(世祖/등극 전의 수양대군)는 조카 단종을 영월에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 섬에 유배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악독하고도 몹쓸 놈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때부터 전 정말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했고, 단종이 더 불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청령포의 모든 유적지를 다 돌아볼 때까지 제 마음은 매우 답답하고, 또 무거웠습니다. 아까 왕방연의 시조비에서 왼쪽으로 내려다보이던 섬 같은 곳이 바로 청령포였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청령포는 섬이 아니고, 3면은 갈수기(渴水期)에도 5메터 정도의 수심을 가지는 깊은 서강 물이 흐르고, 다른 한 면은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 절벽이라 합니다. 어린 소년이 무슨 죄가 있다고 거기에 유배를 시킨단 말입니까?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이라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으니, 그곳은 실로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차라리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면 체념하고 살겠으나, 눈만 들면 민가가 뻔히 보이는 곳에 있으니 그게 더 잔혹한 유배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림은 더 적나라하게 청령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판 왼편 아래의 설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청령포에 관한 안내문 이 곳은 단종이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 막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으로서, 단종이 유배되었던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단종은 청령포에서 영흥리에 있는 형청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이 구역은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 영조 2년(1726)에 일반 주민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를 세웠고,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비가 영조 39년(1763)에 세워져 전하고 있다. 청령포로 건너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게 왕방연의 시조비에서 제가 내려다보며 유람선이라고 생각했던 그 배였습니다. 수십 메터의 넓이를 지닌 강이라 다리를 만들어 거길 건너게 해도 좋으련만 배를 띄우고 도선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긴 거기에 다리를 놓으면 청령포가 물 건너에 있다는 실감이 덜 날 수도 있으니 배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 이 청령포를 기억하게 하는 좋은 방법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청령포는 인기리에 방영했던, 이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용의 눈물"과 "왕과 비(妃)," 그리고 "형제의 강"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용의 눈물 중에는 청령포에서 촬영된 것도 많다고 합니다. 하기야 단종에 관한 부분을 촬영하면서 이 비극의 현장을 제외할 수는 없었겠지요. 아래는 99년 강원도민일보의 기사입니다.(날짜는 불명.) 청령포 관광 '보름새 1만명' -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생활을 한 청령포에 요즘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다. - 세조의 등극 과정을 담고 있는 KBS드라마 '王과 妃'가 최근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뒤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하고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해 드라마의 현장을 둘러보려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 드라마의 이런 시점에 맞추어 청령포에는 20여 개에 달하는 소망탑이 생겨나 새로운 명물로 부각될 전망. 영월군은 드라마 촬영팀이 지난 10일과 11일분 드라마에서 단종이 노산대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는 것이 방영되자 부근에 자갈을 준비해 놓은 것. 그 결과 드라마를 보고 청령포를 찾는 외지 관광객들이 저마다 탑을 쌓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각종 소원 성취를 기원하면서 쌓기 시작한 소망탑은 20여 개가 50cm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2m 전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단종의 유배생활 장면은 오는 17, 18일에도 방영될 예정이어서 청령포의 소망탑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15일 청령포를 찾은 주부 金모 씨(43·서울시 동작구 상도동)는 “드라마에서 단종이 탑을 쌓으며 정순왕후 宋 씨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보고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며 “자식들이 건강하게 성장해 달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나도 탑을 쌓았다”고 했다. 영월군 吳英燮 문화관광과장은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소망탑을 착안했는데 너무 호응이 좋다.고 했다. 단종을 다룬 드라마 덕에 이달 초부터 14일 현재까지만 청령포를 찾은 관광객은 1만1천412명으로 이는 98년 같은 기간에의 4천162명에 비해 7천250명이나 큰 폭으로 늘어난 것. 또한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에도 4만1천941명이 찾아 98년 같은 기간 6천613명에 비해 3만5천328명이라는 엄청난 증가세를 보여 드라마 유명세를 톡톡히 보고 있다. 한편 청령포는 단종이 1456년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2개월간 귀양살이를 했던 곳으로 영월읍 방절리와 남면 광천리에 걸쳐 3면이 푸른 강으로 싸여 있으며 단종유지비각과 금표비,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 등의 유적이 있다. 寧越=房基俊 kjbang@kado.net 청령포에 건너가서 강 건너 왼편을 보니 거기 왕방연 시조비가 서 있는 송림이 보입니다. 역시 아는 게 힘. - 청령포에서 바라다 본 왕방연 시조비가 서 있는 언덕. 청령포의 강변을 지나 솔밭 사이로 들어가니 집이 보입니다. 단종이 거처하던 곳이라 어가(御家), 혹은 어소(御所)라 불리는 바로 그 건물이라 생각했습니다. - 클릭하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어가의 가까운 모습. 어가의 왼편에는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시녀들)이 기거하던 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개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입니다. 그곳에는 원래 "두견새 우는 청령포"란 노래의 가사에서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라고 한 것처럼 "단묘재본부시유지비"의 비각만 서 있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 영조 시절에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아래는 안내판에서 옮긴 것입니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 이곳은 1457년 6월 22일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처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 39년(1763년)에 이 비를 세워 어소 위치를 전하고 있다. 비의 총 높이는 162cm로서 1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비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라고 음각되었으며, 후면에는 "황명승정 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문체경서 영원영 수석 지명 청령포"로 음각되어 전면, 측면 각 1칸씩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단종의 능에 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단종을 참배하듯, 능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고 하더니, 단종 어가 앞의 소나무도 어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어서 받침목(실제론 쇠파이프)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전 단종의 애사를 생각하면서 계속 어두운 마음이었는데, 제 옆에서 그곳을 둘러보던 가족 중 한 부부가 저와 똑같은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죠? 지금 일도 아니고 600년 전 얘긴데???"하고,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대로 600년이 좀 못 된 540여년 전의, 아주 오래된 얘깁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억울한 심정으로 살다, 한(恨)을 품고 죽은 단종의 비통한 마음이 그곳을 둘러보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절절이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고 있음을 누구나 느꼈을 것입니다. 단종의 마음에 맺힌 원한과 비통한 심정이 아래, 단종이 직접 지은 시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이것은 어가의 마루 위 중앙에 걸려 있습니다.) - 어제시(御製詩) - 단종 임금이 지은 시. 단종이 지은 시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단종이 유배된 시절의 영월에는 맹수까지 들끓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사대문 밖으로만 나가면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니... 그 당시에 살던 맹수 중 가장 포악하고, 못된 맹수가 아마 세조란 짐승이었을 것입니다. - 어가에는 단종과 단종을 모시던 시종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한 것이 있었는데, 좀 어설펐습니다. 본격적인 밀랍인형(蜜蠟人形)으로 보다 사실성있게 마네킹을 제작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여러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어설픈 마네킹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납니다.^^ 만드신 분들은 그걸 위해서도 많은 신경을 쓰시고, 고생하셨을 테니 제가 그럼 안 되겠지만...) - 사진의 왼편에 있는 것이 "단묘재본부시유지비"의 비각입니다. 이 비각과 어가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금표비(禁標碑)가 있는데, 이것은 단어 그대로 뭔가를 금(禁)하는 표식입니다.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처음에 이 금표비란 비석의 안내판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래는 안내판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금표비 안내판 금표비는 단종께서 1457년에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년)에 세운 비석으로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이라 새겨져 있다.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안내판을 읽으면서 전 세조가 단종을 이곳에 유배시켜 놓고도 모자라 백성들이 단종을 만나러 오는 것마저 막는 금표를 세워 놨다고 생각하고 더 치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안내문을 읽어보니 그런 건 지나친 해석이더군요. 금표비가 단종이 청령포에 계시던 때로부터 269년 후에 세워진 것이고, 그때는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복권(復權)된 때이기 때문입니다.(단종은 1681년 숙종 7년에 대군에 추봉되었고, 1698년 숙종 24년에 다시 임금으로 복위, 완전 복권되었다.) 안내문에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라고 마지막에 덧붙여 놓은 것이 그런 저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더군요. 오히려 이 금표비는 왕이 계시던 곳이니 백성들은 함부로 출입하지 않도록, 그 지역의 보존 차원(?)에서 그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민권 사회가 아닌, 왕권 사회에서 그런 일은 능히 가능한 게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워낙 청령포의 어가 부근이 좁아서 대부분의 유적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금표비에서 머지 않은 곳에 관음송(觀音松)이 있었습니다. - 관음송.(클릭하면 나무의 위 모습이 나옴.) 이 소나무는 1988년에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것으로서,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 사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관음이라고 하면, 관음보살(觀音菩薩) 등의 이름 때문에 귀에 익은데, 이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단종의 유배 당시 그 처연한 모습을 보고(觀), 때로 한 맺힌 단종의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이런 이름으로 불려 온 것이라 합니다. 진위 여부를 차치하고, 참으로 설득력있는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라 있습니다. 이 나무의 수령을 대략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 시에 나무 틈에 걸터앉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수령(樹齡)을 80년 정도로 보고, 유배 연대와 함께 계산한 것이라 합니다. 관음송은 청령포의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관음송의 갈라진 나무 틈새를 바라보며 거기 앉은 한 작은 소년의 처량한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데, 단종 어소 주변이 좀 소란합니다. 거길 바라보니 한 스무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MT를 온 것 같은데, 거기서 웃고 떠들며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바라보며 특별하게 분노라든가 하는 감정은 없었습니다. 걔네들은 단지 그곳에 놀러 온 철없는 아해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이 다음에 청령포는 그들에게 즐거운 MT 놀이터 중 하나로 기억되고 말겠지요. 관음송에서 좀더 가면 야트막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계단이 없다 보니 난간처럼 매어져 있는 밧줄을 잡고 오릅니다. 그 동쪽 언덕을 오르면 강봉되어 노산군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단종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눈물지었다는 노산대가 있습니다. 단종은 해질 무렵이면 항상 이곳에 올라 석양을 바라보며 멀리있는 한양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멀리 태백선 철길이 보이고, 단종이 건너가고 싶어했을 반대편 강변의 모래밭이 보이며, 그것과 절벽 사이에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이 보입니다. 예의 바로 그 강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그 강물은 옛날과 다름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덧없는 세월에, 변치 않는 자연입니다. 그런 무심함 속에 세월을 거슬러 슬픔을 느끼는 존재는 인간밖에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영월 팔경의 하나로서 풍치가 빼어나기로 소문난 청령포는 그래서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슬픔이 찬란하다고 표현되는 것처럼, 그런 슬픔과 아픔이 그 빼어난 풍치로 인해 더 가슴에 아려 왔습니다. 그때부터는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세조에 대한 미움조차도 희석되는 것 같더군요. 아니 희석된다기보다는 그런 미움을 덮을 만큼 슬픔의 깊이가 더 깊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단종의 상대역(?)으로서의 세조가 아니라, 비극을 걸머진 단종이 다른 주변 인물들을 압도하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조금 자리를 옮기니 망향탑이 보입니다. 아주 조그만,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탑입니다. 망향탑 단조대왕께서 유배되시어 이 곳에 머무시는 동안 왕비 송씨를 생각하면서 돌을 주어 쌓아올린 탑입니다. 망향탑으로 남아있는 단종의 아픈 마음이 이 탑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저의 마음이 더 아파집니다. 이 자리에서 청령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데, 강물의 휘감아 도는 전경이 청령포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라고 합니다. 저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청령포와 그 주위는 모두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도 평생을 비운(悲運) 속에 살다 갔습니다. 14세에 결혼하여 불과 3년 정도 단종과 함께 살았을 뿐인데, 단종이 죽은 후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순왕후는 여산 송(宋)씨로 여량부원군 송현수(宋玹壽)의 딸인데, 단종 2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이듬해 의덕왕대비가 되었으나, 세조 3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될 때 부인(夫人)으로 함께 강봉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단종의 영월 유배 이후, 영영 상봉을 못하고 통한의 일생을 끝마친 것입니다. 정순왕후의 능은 사릉(思陵)으로서 경기도 퇴계원에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비극의 주인공인 단종은 사후에조차 서울로 환도하지 못 하고 장릉에 묻혀 있으니, 사릉과는 수백 리나 떨어져 있고, 두 사람은 내내 고혼(孤魂)으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나중에 장릉에 가 보니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있음을 증거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더군요.) 정순왕후는 강봉된 후에 돌보는 이가 없어 구걸을 하여 연명했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어찌 보면 단종 이상의 비참한 삶을 산 것이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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