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골터줏대감/남양주역사자료

사릉과 장릉의 관계(3)

은빛사연 2011. 5. 2. 23:42

비극적인 역사의 무게에 눌려 편치 않은 마음, 답답한 심정으로 다시 어가 쪽을 거쳐서 청령포의 입구로 나왔습니다. 도선장에 내려 청령포의 강변을 걸어 들어가면서 본 청령포 안내판 뒤에 단종 어가를 2000년 4월에 낙성하면서 올린 축문이 한자와 한글로 쓰여 있었습니다.

단종어가 낙성 고유 축문
경진년 2월 30일(2000년 4월 4일)

영월군수 감히 고하나이다.

단종대왕이시여
나라의 운이 크게 돌아와 영월의 상서로운 복이 오도다.
신위를 봉안하여 지성으로 예를 행합니다.
대왕께서 돌아가신 후 어가를 돌보지 못 하다가
군민의 총의를 모아 금일에야 낙성하게 되었으니
슬픈 마음 이길 길 없고 신민된 출정 부족함을 진실로 뉘우칩니다.
4천만 국민 모두가 대왕의 외로운 혼을 슬퍼하고 슬퍼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 금할 길 없습니다
비록 하늘 저편에 계시나 뭇별들이 숭앙하고 있습니다.
어가를 복원함이 너무나 늦은 느낌이 있으나
이제 청령포 옛 어가(御家)에 다시는 지난날과 같이 어지러움 없을 것이니
평안하게 강림하여 백성들의 추앙함을 받으소서.
엎드려 비옵건데
존령이시여 작은 정성이지만 흠향하시고
더욱 우리를 비호하여 주시고 영월을 평안케 하여 주소서.
이에 감히 고유드립니다.


뒤늦은 일이나 참으로 잘한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거기서 좀더 걸어 나온 곳에 있는 두 개의 탑에서 집사람이 사진을 하나 찍자고 했습니다. 바로 아래 사진입니다. 이런 돌탑은 자연스럽게 돌을 모아 쌓아올려야 제격인데, 이것은 안에 시멘트를 부어 쌓은 돌탑이어서 정이 덜 갔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자연미가 결여된 탑을 만들어 놓았는 지 모를 일입니다.



청령포를 나와 단종의 묘인 장릉으로 향했습니다. 장릉은 거기서 머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이곳은 조선 단종(1441-1457)이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단종은 문종의 장남으로 문종 즉위년(1450) 7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부왕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나이로 1452년 5월 18일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숙부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단종의 보필신을 죽이고 국권을 장악하였다.(계유정란) 단종 3년(1455) 가을 금성대군 유가 중심이 되어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자 노산군에게 종사에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서인으로 폐하는 한 편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니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관을 준비하여 남몰래 지금 능이 있는 동을지산(冬乙支山)에 매장하였다.
그 후 중종 11년(1516) 우승지 신상이 치제한 이래 25여년 수묘치 않아 폐묘가 되었던 것을 중종 36년(1541)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애절한 제문을 지어 치묘, 치제하였는데 그 때 지은 제문은 오랜 기간 이어왔다.
노산군이 돌아가신 후 224년 만인 숙종 7년(1681)에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마침내 숙종 24년(1698)에는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은 장릉이라 하였다.
능 양식은 가장 간단하고 작은 후릉석물의 양식을 따랐다. 특히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하여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고 정단에는 안평대군 이하 32인, 별단에는 조수량 등 254인을 배향한 것이라 하겠다.


장릉에 들어서니 왼편에 재실(齋室)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오른쪽의 동산을 올라 단종의 능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을 오르기 직전에 작은 비각이 하나 있더군요. 낙촌비각(駱村碑閣)입니다.



이 낙촌기적비(駱村紀績碑)는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 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비각입니다. 이 비각이 박충원 시절에 세워진 것은 아니고, 1974년 5월 5일에 낙촌의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이라 합니다.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 선생이 비문의 요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구신 등 삼족멸문(三族滅門)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하였다. 이 때 단종마저 사사(賜死) 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의 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 호장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群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며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은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 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 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 묘소를 수소문함에 엄 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후부터는 군수가 부임 초에 죽어 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낙촌비각을 오른편에 끼고, 별로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조금 걸으니 저 앞에 단종의 능이 보입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별로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능입니다. 이 길의 왼편 비탈 아래로는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丁字閣) 등이 있습니다.



장릉의 유래

제6대 단종대왕의 능이다.
세조 3년(1457년)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 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시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기셨다.
세조 3년 다섯 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그 해 10월 24일 사사되었는데, 그 때 춘추 17세였다.
단종의 유해는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을 하였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 36년(154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하였다.
숙종 24년(1698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 지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후릉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따라 능전에 상석 1좌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있고, 그 한단 아래에 사각옥형 명등석 1좌와 문인석과 마석 각 1쌍이 상면 설치되어 있고, 무인석은 없다.(실록의에 근거.)


영월호장 엄흥도가 충신은 충신이로군요. 이 사람은 단종이 청령포에 있을 때에도 남의 이목을 두려워 않고, 그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또 한 가지 일은 이 엄흥도가 아들과 함께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직접 御命으로 내려 진 嚴命)을 어긴 채, 목숨을 걸고, 동강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밀장을 한 후에 몸을 숨겨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단종의 능은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산 속으로 도망치던 중 눈이 쌓이지 않은 곳에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기에 단종의 시신을 묻은 것인데, 이 자리가 천하 명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건 후일에 지어낸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시신을 수습하고, 삼족이 멸할 것을 피해 사라진 엄흥도의 얘기가 어떻게 후세에 전해 졌겠습니까? 혹시 나중에 엄흥도의 자손을 자처하는 후손들이 나타나 그런 얘기를 전한 것이라면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나중에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높은 벼슬에 추서되는 등의 영광을 입기는 하였지만, 당대의 엄흥도는 군을 향한 충성심으로 자신의 영화를 포기하고, 숨어살다 평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의인(義人)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엄흥도와 같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 장릉.

능쪽으로 올라갈 때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소나무가 내려오는 길에 눈에 띕니다. 전 왠지 그 소나무가 무슨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으로 찍어 놓았습니다.



소나무 앞에 조그만 비석이 있습니다. 정령송(精靈松)이란 이름을 가진 소나무로서 99년에 남양주문화원에서 심은 것입니다. 그 밑에 쓰인 글을 보니 "사릉에서 이전 식수(植樹)"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했지만, 사릉이 누구의 능인 지를 몰라서 '나중에 알아보리라.'고 생각하며, 돌아 왔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릉이 정순왕후의 능이었습니다.



아, 그 비극. 잊고 있던 또 하나의 비극이 떠오릅니다. 그 "정순왕후의 영혼을 담은 소나무"라는 의미로 그걸 精靈松이라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단종 유배 후에 영영 이별하고, 나중에도 합장(合葬)되지 못한 그들을 위해서 정순왕후의 능에 있던 소나무를 이전한 것입니다. 남양주문화원에서 한 일인데, 정말 문화원다운 멋진 사업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근데 단종의 어가에 있는 소나무도 그렇고, 이 장릉의 소나무들도 모두 단종의 묘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얘길 청령포에서 들었는데, 위의 정령송마저도 단종의 묘를 향해서 허리가 굽어 있군요? 뒤늦게 나마, 14세의 어린나이로 결혼하고, 겨우 3년을 함께 산 그 불행했던 두 젊은이들의 영혼이 함께 만나 행복을 찾았기를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불행이 없는 행복한 한 쌍으로 이 시대에 환생(還生)하였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렇게 환생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부름 때문에 (전생의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면서) 청령포와 장릉을 찾아 본 후에 마음 아파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오랜 세월 후의 아픔으로 당대의 원한과 슬픔이 정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종 묘에서 내려와 능의 다른 곳들을 둘러 봤습니다. 아래 사진의 가운데, 높은 곳에 단종 묘가 보입니다. 집사람이 능의 홍살문을 사진으로 찍고 있는데, 그 앞에 보이는 세 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맨 오른쪽의 조그만 건물은 수복실이라 하여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서 영조 9년(1733)에 주 건물인 정자(丁字) 형태로 생긴 정자각(맨 왼편에 있는 큰 건물)과 함께 세운 것이라 합니다.

중간에 있는 건물은 단종비각으로서 숙종 24년(1698년)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함과 동시에 이 비각을 세운 것인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비석의 뒤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정자각은 능의 바로 밑에 지어진 것으로서, 영조 9년(1733년)에 건립되었으며, 단종을 위한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리는 곳입니다. 집의 모양이 실제로 한자의 정(丁) 자와 같습니다.



정자각 안에는 운보 김기창 선생이 그린 단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모사본으로서 진품은 영월의 주산(主山)인 삼각산(매봉산) 자락의 영모전에 있다고 합니다. 정작 정자각에는 이런 사실에 대한 설명도 없이 덜렁 그 모사본만 걸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 그림의 진품을 보려면 영모전에 가라고 해도 좋았지 않겠는가? 그로써 영월의 관광 사업에도 일조할 것이 아닌가?' 조선조 중종 시절인 1517년에 단종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에는 원래 군수 이계진이 영모전이란 현판을 걸고, 백마를 탄 단종의 영정을 그려 걸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현판과 영정이 6.25의 전란 속에서 훼손되고 말아, 전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영모전의 현판을 다시 쓰고, 운보가 새로운 단종의 영정을 그리면서 단종을 모시던 추익한이 단종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으로 바꿔 그렸다고 합니다.



정자각에서 밑으로 내려가니 영천(靈泉)이 있습니다.

- 영천. 클릭하면 이 제정(祭井/제사에 쓰는 물을 퍼 올리는 우물) 내부의 광경.

영천

이 영천은 장릉의 제사를 지내는 우물로서 정조 15년(1791)에 군수 박기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 제정으로 칭하게 되었다.
보통 때에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每寒食時水出)
우물의 구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 있고, 우물 깊이는 1.5미터 정도이고 화강석으로 정방형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다.


다시 홍살문 쪽을 거쳐 장릉의 입구로 가는데, 거기 엄흥도 정려각이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게 된 의인 엄흥도를 위한 비각입니다.


- 한 가족이 아래의 내용을 담은 엄흥도 정려각의 안내문을 읽고 있습니다. Kosa는 열심히 정려각의 내부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보입니다.^^

엄흥도 정려각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던져지자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도받고 있다.
영조 34년(1758)에 공조판서로 추봉되었고, 순조 33년(1877)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려각에서 좀더 내려오니 장릉의 입구가 보이는데, 장릉에 오르기 전에 아까 입구에 들어서면서 왼편으로 보였던 재실(齋室)이 나타납니다. 아주 아름다운 한옥입니다. 역시 전 한국 사람이라 한옥만 보면, 그것도 잘 만들어진 한옥만 보면 너무나도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그 한옥들은 고향집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안에 들어서니 역시 기대하던 광경 그대로 입니다. 어쩌면 이렇게나 단아하고, 깔끔하면서도 평화로운 광경인지요?



재실(齋室)

이 건물의 처음 건립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 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0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 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 오던 곳이다. 1997-1998년 재실 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하였다.


모처럼 저도 재실의 대문에 기대서서 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영월에서 찍은 저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대문 바깥으로 보이는 신록과 따사한 햇볕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렇게 길고 긴 단종 유적 방문을 마쳤습니다. 그 외에도 영월엔 많은 단종 관련 유적들이 있는데, 그들 유적 방문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도 좀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집사람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원주 부근에 이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길옆에 서서 차의 지붕을 덮고, 마음처럼 어둡게 변해 버린 빗길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세조 나쁜 놈.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 진짜 나쁜 놈.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그가 이룬 어떤 치적(治積)을 통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조는 정이품송(正二品松)과 같은 사기극까지 만들어서 민심을 바꿔 놓으려고 했었겠지요. 소나무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서 늘어졌던 나뭇가지를 하늘로 들어올렸겠습니까? 1457년에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세조가 신병 치료차 속리산에 간 것이 1464년이니, 그 병이 다른 병이 아닐 것입니다. 그도 인간이라 조카를 죽인 마음의 병이 크게 도졌던 것이겠지요.

 

(이상 본문내용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