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골터줏대감/남양주역사자료

사릉과 장릉의 관계(1)

은빛사연 2011. 5. 2. 23:46

단종(端宗)의 유배지 청령포(淸玲浦)에 다녀오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는데, 그 첫 주는 정말 멋지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을 하루 보내고 나니 5월 1일(화)인데, 그게 부처님 오신 날이라 또다시 휴일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메이 데이(May Day), 즉 노동자의 날과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쳐서 이틀이 아니라 하루밖에 놀지 못 한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전 그런 휴일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고마운 사람이라 5월의 첫 날을 아주 기분 좋게 맞았습니다. 게다가 그 첫 주의 토요일이 어린이날이니 일요일과 함께 연휴가 됩니다. 이 계절의 여왕을 멋지게 시작하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암리의 서낭당이란 글에 썼듯이,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강원도 영월에 다녀왔습니다. 휴일에 어딜 가겠다는 확실한 계획도 없이 그 날 아침을 맞은 것은 벌써부터 대학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고등학교 2학년의 아들녀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는 어딜 간다는 얘기도 않고, 집사람과 함께 집은 나선 것이 10시 정도입니다. 먼 곳을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선 것이지요.

올림픽 대로에서 중부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처음엔 집에서 멀지 않은 곤지암(실제로는 퇴촌면 우산리)의 천진암엘 가 보려 하였습니다. 1780년에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그곳 천진암에서 한국 최초로 천주교에 대한 강학(講學)과 수련의 모임을 가졌던 곳으로서, 1980년 대 이후에 우리 나라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 부상한 곳입니다. 불교의 암자(庵子)에서 최초의 천주교 강학이 이루어졌다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곳은 10여년 전 어느 가을엔가 우리 가족 넷이서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던 곳입니다.

아직 결정은 안 한 상황이므로 집사람에게 지도를 주고 더 좋은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목적지를 바꿀 수 있으니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에 해수욕을 위해서나 겨울철에 스키 여행을 위해서 영동고속도로 쪽으로는 워낙 많이 나갔기 때문에 기왕이면 대전 방향의 목적지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찾아내는 족족 절(寺)입니다. 하지만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면 번잡하기 그지없을 것이니 절은 피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여에 가자고 합니다. 부여는 저도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어하던 곳입니다. 하지만 부여까지 가는 것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길 가려면 차가 밀리지 않는 아침 7시경에 집을 떠나서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부여의 그 많은 유적지를 둘러봐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길 포기하기로 하니 적당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 집사람이 다시 제안한 곳이 영월입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에 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월도 좀 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생각하니 제가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인 강원랜드 카지노가 그 부근인 것 같습니다. 그게 태백에 위치한 곳이라니... 멀긴하지만 겸사겸사...

제가 강원랜드에 가보고 싶어했던 것은 그 오지(奧地)의 폐광촌에 어울리지 않는 카지노가 설립되고, 그것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였습니다. 컴덱스 참가 관계로 여러 번 가 본 미국의 라스베가스 카지노들은 물론, 여행 삼아 가본 리노(Reno)나 동부의 어트랜틱 시티의 카지노에 비해 강원랜드는 규모나 시설면에서 그들 세계적인 도박의 도시보다는 못 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도박엔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기차로만 지나치던 태백의 정경을 승용차를 가지고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것뿐이었습니다. 이미 이천 휴게소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곧 경부냐 영동고속도로냐의 분기점인 호법 인터체인지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영동고속도로 쪽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영월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동고속도로에 접어들어서 집사람이 지도를 보고, 알려 주는데 전 영월과 태백이 지척인 줄 알았더니 태백은 거의 동해안 쪽에 가깝더군요. 그래서 거긴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영월도 가깝지는 않은데, 어쨌든 목적지가 정해졌기에 계속 달려갔습니다. 그 전날 예보를 들으니 강원 지방에는 비가 올 것 같다고 했는데, 이날은 비가 올 날씨는 아닌 듯 하나 해가 나지 않았고, 약간 서늘했기 때문에 차의 지붕을 열고 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월에 가려면 원주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남원주 쪽 인터체인지로 빠져서 서제천 쪽으로 가야 합니다. 인터체인지에 접어드니 해가 약간 나고, 날씨가 좋아졌기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소프트 탑(soft top)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금방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이 오더군요.^^


- 이 약도의 길 중에서 전 주천에서 연당 주유소 쪽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동그란 큰 점이 제가 들른 청령포 주차장, 청령포, 그리고 장릉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5월은 라일락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야생화인 조팝나무의 계절이기도 하더군요. 달리는 길가는 물론 산에도
조팝나무의 흰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연당을 지나니 동강의 안내판이 가끔 나타납니다.



동강(東江)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 댐을 건설하는 자연파괴 행위를 한다고 하여 온국민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져 요즘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그로 인한 심각한 자연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새옹지마.

동강은 태백시의 검용소에서 발원하여 골지천을 흐르다가, 임계천, 송천과 합수(合水)하여 조양강을 이루고, 오대천과 합쳐지며, 정선읍을 지나서 가수리의 동남천과 합류하기 전까지의 강을 말한다고 합니다. 가수리부터 하류 구간이 동강인데, 이것이 "고기가 비단결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란 의미"의 어라연(於羅淵)을 만들며, 더 흘러서 영월읍의 동쪽을 거쳐 서강(西江)과 합류함으로써 남한강(南漢江)이 되고, 양수리에 이르러 북한강과 합수한 후 한강이 된다고 합니다.

집사람과 제가 향하고 있는 청령포(淸玲浦)는 서강 주변에 있는 것이고, 동강은 거기서 좀 떨어진 영월읍을 지나 더 달려가야 합니다. 역사에 의하면 단종은 서강에 둘러싸인 청령포에 머물다가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고, 나중에 사약(賜藥)을 받은 후에 그 시신이 동강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전 사실 이 여행에 앞서서 단종에 관한 약간의 상식은 있었지만 청령포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을 전공한 집사람은 처음에 영월에 가자는 것이 아니고, "청령포에 가 보자."고 하더군요. 그제야 청령포가 단종의 유배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단종에 대하여 처음 안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단종애사"라는 영화가 있었고, 제가 그 영화를 봤었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지는 않지만 숙부가 왕이 되고 싶어서 조카를 죽이는 게 참으로 가혹한 일이라고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단종이라는 단어보다는 단종애사라는 단어, 그 영화 제목의 이미지가 그날까지도 훨씬 더 강했습니다. 실은 그날에서야 단종애사의 의미를 되돌이켜 보았을 정도입니다. 전 결국 이전에는 "단종=단종애사"의 등식으로 단종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날 운전 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애사라는 것이 哀史, 즉 슬픈 역사이더군요. 그러니 端宗哀史는 "단종의 슬픈 역사"라는 뜻이지, 단종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어린 시절에 본 영화 때문에 그걸 50줄이 가까운 이날까지 엉뚱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로 가는 길목엔 아주 다양한 관광지들이 있더군요. 길가에 관광객을 위한 이정표가 따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런 것이 큰 동네 부근엔 꼭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영월땅은 정말 깊고도 깊은 곳에 있더군요. 오지(奧地)라는 말이 딱 알맞은, 영어의 hinterland이자 outback이 그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원도 산간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구비구비 돌고돌아 어쩜 그렇게 깊이도 들어갑니까? 그 옛날 단종이 일주일이나 걸려 그 유배지에 도달했다더니... 그렇게 좀더 달려가니 삼거리가 나오고, 드디어 왼편으로 청령포의 안내판이 나타납니다.


- 이때의 날씨는 아주 좋았습니다. 해가 좀 나왔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좀더 달려가니 오른편에 강이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 일군(一群)의 노송들이 모여 서 있는 아주 경치 좋은 곳이 나타나기에 거기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그 노송 밑에서 강을 굽어보면 멋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거기 그럴 듯하게 생긴 탑도 하나 서 있었는데, 전 '별 거 아니겠지.'하는 생각으로 그걸 지나쳐 가서 강을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경치입니다.


- 노송 가운데로 보이는 것이 서강입니다. 이곳이 강을 굽어보는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강과 그 옆의 섬이 잘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강엔 유람선도 떠 있더군요.

강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있는데, 집사람이 얘길했습니다. "이거 봐요. 이게 왕방연의 시비(詩碑)예요." 왕방연? 아주 귀에 익은 이름입니다. 분명 현대 시인은 아니고, 교과서에 나왔음직한 귀에 익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시비(시조비) 쪽으로 가 봤습니다.



거기서 아주 귀에 익은 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왕방연이 누군가를 알 수 있었고, 그 시가 무얼 의미하는 지 금방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이거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교과서에 나왔던 시조가 아닌가?'

"천만 리 머나먼 길인 강원도 영월 땅에서 고운 임 단종을 이별하고, 내 슬픈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시냇가에 앉아 있으니, 저 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흘러가는구나"의 의미로 이의 주제는 "단종 임금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마음"이고, 작자의 슬픔을 흐르는 물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임금에 대한 충절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고 있고, 나아가 슬프고 애통한 정서를 지닌다고 해야 정답으로 처리해 주던 바로 그 기출(旣出) 문제에 속하던 중요한 시조...

아니나 다를까, 시조비의 뒤로 돌아가 사연을 읽으니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곳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다.
1617년 병조참의 용계 김지남이 영월 순시 때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위의 글에 의하면 160년간 이 내용이 아이들의 노래로만 불리다가 시조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왕방연이 당시에 이와 같은 내용의 시조를 지었는 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명을 받아 대역의 죄를 지은(?) 것이라 단죄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러 왔던 그가 단종을 "고은 님"으로 칭하고, 또 마음이 아팠다는 얘길 내놓고 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어떤 자료에서는 왕방연이 단종 유배 시에 단종을 모시고 영월에 간 사람이라고 한 것도 있는데, 이건 틀린 내용입니다. 정확한 것은 중추부사 노득해가 군졸 50인과 함께 단종을 호위하여 원주, 주천을 거쳐 청령포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오해는 왕방연의 시조 내용을 보면, 그게 마치 단종을 유배지에 모셔놓고 올라가는 사람의 회한을 표현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왕방연의 시는 어쨌든 김지남이 뒤늦게 한시로 지은 것이니, 그 시의 내용이 되었다는 아이들의 노랫가락은 아마도 단종의 애사(哀史)를 가슴아파 한 영월의 선비 중 하나가 왕방연의 마음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데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시조를 읊었던 곳이라니? 청령포가 어딘가?

하여간 거기서 한참 감회에 젖어 있다가 다시 청령포를 향해 갔습니다. 얼마 안 가서 청령포로 들어가는 곳이 나오더군요.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 한 구석에 있는 관광 안내도를 보았습니다.(
자세한 약도 참조.) 역시 많은 관광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은 다른 곳에 들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직 많이 비어 있는 주차장에는 몇 대의 관광버스가 서 있었고, 승용차들도 여러 대 세워져 있었습니다.


- 주차장 옆에 있는 산장입니다. 이 부근에서 숙박을 하려면 이곳이 좋을 듯.


- 이것은 유명한 동강 래프팅(레프팅?) 사가 이곳에 있음을 보여주는 현수막입니다.(클릭하면 동강 래프팅의 캠프.)
동강 래프팅 사의 홈 페이지 URL은 http://www.orayon.co.kr/

주차장에서 청령포 쪽으로 걸어가는 길목에는 아래와 같은 노래비가 서 있었습니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라니 왠지 좀 촌티(?)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요즘 관광지에 가면 그곳과 관련된 노래비들이 한두 개 정도는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래비의 하단에는 아래와 같은 가사가 쓰여 있었습니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작사: 이만진
작곡: 한복남
노래: 심수경

1. 왕관을 벗어 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 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2.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

3. 동강물 맑은 곳에 비춰주는 달을 보고
님 가신 뒤를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고나
아, 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 피고 지네.


재미있는 것은 위 사진의 왼편에 검게 보이는 것이 쥬크 박스(juke box)라는 것입니다. 500원 짜리 동전을 넣으면 위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인데, 하필 동전이 없어서 그 노랠 들어보지는 못 했습니다. 노래 가사를 보아서는 매우 청승맞고, 처량한 노래일 것 같더군요. 위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장릉에 잠들었네."를 보고, 단종의 능이 장릉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비각만 남아있네."란 구절로 보아, 어떤 유적인가가 훼손되어 비각만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의 가사는 거의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을 듣는 것 같은 내용입니다.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는데, 그런 궁녀들이 있었고 그들이 단종이 죽은 후에 동강에 몸을 던졌으며, 그래서 동강에도 낙화암이란 절벽이 존재한다는 걸 짐작케 하더군요.

영월엔 강릉 부근에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논하는 것처럼 영월팔경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팔경은 관동팔경과는 달리 어떤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영월 지방의 선비들에 의해 지어진 시적(詩的) 풍경으로 8가지의 대표적인 것을 네 글자의 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중 두 가지가 단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냉포두견(冷浦杜鵑)으로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소리와 그 쓸쓸함을 나타낸 시"입니다. 이걸 보면 "두견새 우는 청령포"란 노래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또한 단종은 청령포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을 때까지 청령포에서만 지낸 것이 아니고, 유배된 그 해에 큰 홍수가 나서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 관풍헌으로 옮겨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관풍헌은 그 이전에는 객사(客舍), 즉 관의 Guest House로 사용됐던 곳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매죽루(梅竹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단종이 그곳에서 떠나 온 한양과 왕비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자규시를 읊었다는 연유로 이 누각이 자규루(子規樓)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단종이 지은 자규시의 내용입니다.

자규시(子規時)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에서 나오니
짝 잃은 그림과 꿈은 산중이로구나.
밤마다 틈을 타서 잠들려도 못 이루어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원한 맺힌 그 한을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이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애소를 못 듣는데
어찌하여 수심많은 내 귀에만 들리는가.


자규새가 바로 두견새임을 보면 이 두견새와 청령포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종과 관련된 두 번째의 영월팔경 중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한 단종 시녀들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금강추월(錦江秋月)입니다. 이는 동강의 맑은 가을 물 속에 잠긴 달을 말하는데, 그것은 그 옛날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의 투신자살한 넋을 추모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