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골터줏대감/남양주역사자료

진접의 지명유래(남양주시 진접읍)

은빛사연 2011. 12. 11. 23:21

남양주시 - 진접읍(榛接邑)


◎ 장현리(長峴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 년 장승리의 '장(長)자와 봉현리의 '현(峴)wkfmf 따서 장현리라 하고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봉현 (蜂峴)'이라는 이름은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라고도 하는데, 조선 초기에 마을 동쪽에 조그 마한고개에 벌집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벌 때문에 그 곳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 개를 '벌우개', '비리개', '버리개', '보루개' 등으로 불렀으며,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이름도 '벌이 많은고 개 마을'이라는 의미의 '봉형(蜂峴)'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세조와 관련된 지명유래도 전하는 데, 세조는 자신의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직접 땅을 돌아보던 중 불길한 땅에 묘 자리를 쓰고 있는 상 주를 만났다.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 300냥을 주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하고 묘 자리를 잡아준 사람을 물으니 바로 자신이 찾던 이생원이라는 자관이었다. 세조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이생원을 찾아 그 집에 이르러 그 묘 자리의 길흉을 물으니 " 그 근방이 길지(吉地)가 있지만 현 장지(葬地)는 당장 300 냥의 큰 돈이 생기므로 가난한 상주에게 금시발복(今時發福)할 자리를 정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감탄한 세조는 "당신같이 잘 아는 사람이 왜 산골에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그 의 집을 보며 물으니, "국왕이 친림(親臨)하실 곳이므로 이 곳에 산다."며 짚자리를 문 밖에 깔고 백배 사죄하였다. 이생원의 능력에 감탄한 세조는 그와 동행하여 현재의 광릉을 능자리로 정하였 다.

그 뒤 광릉에 능을 만드는데, 그 곳에서 큰 벌이 나올 것이라 하여 주관하는 지관이 지금 의 장현리 벌우개로 대피하여 큰 독을 뒤집어 쓴 지관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부터 이 동네는 '벌 우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승리'라는 지명은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하였는 데,
'장승(長承)·장승배기 매봉제'라고도 한다.
예전에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어서 '장승' 또는 '장승배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봉제'라 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장승·들판·논에 물을 대기 위한 보(저수지)라는 뜻의 '장승배기보', 장승 에 있는 들판이라는 뜻의 '장승벌'이라는이름이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 내각리(內閣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접동면 지역으로 1914년 내동리의 '내(內)'자와 비 각리의 '각(閣)'자를 따서 내각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한편 내각리에는 풍양궁이 있었다 고 하여 '궐리(闕里)·대궐터·구궐지(舊闕址)' 등의 이름이 있다.

정종은 1400년(정종2) 11월에 왕위를 아우 정안군(후에 태종이 됨)에게 양위하고,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풍양궁터로 옮겨가 게 된다. 병이 심해져서 심신을 휴양하기 위해 아우


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내용의 교서(敎書)를 내고, 정종이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곳 대궐 터(풍양궁터)이다. 물론 여러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쉬기 위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휴식을 취하겠다는 것은 정종의 솔직한 본심이었을 것이다.

이후 정종의 아버지인 태조도 이 곳에 머무르게 된다. 1402년(태종 2년) 태조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 방석과 방번이 참변을 당하자 태종 을 미워하며 함흥으로 가버린다. 그 곳에 머문지 4년 만에 박순(朴淳)의 충언에 감동되어 서울로 돌아오 는 길에 이 곳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자 내각들이 와서 모시고 갔다고 한다.
이렇게 대궐터는 태 조, 정종, 태종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그렇지만 대궐터는 이름 그대로 대 궐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이, 태상왕(太上王)과 상왕(上王)이 왕위를 물러나 머물던 곳이 라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이 마을은 '비각촌' 혹은 '비각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성계가 정 종에게 왕위를 전하고

상왕으로 있을 때 이 곳에 행궁을 정했던 곳이라서 비각(碑閣)을 세 운 후로, '비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비각촌'혹은 '비각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새말'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임진왜란 때 풍양궁은 물론이고 이 곳이 모두 불타버리자, 새로이 집들이 들어서고 마을을 형성하게 된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 다.

내동(內洞)은 이성계가 비각마을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있을 때, 왕비 강씨가 임시로 거 처하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안마을이라는 뜻의 '내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비각(碑閣) 리'는 대궐터에 있는 비각에서 유래하였다. 비각에는 1755(영조 31), 1905년(광무 9)에 세워진 2기의 비 석이 있는데, 이는 이곳이 풍양궁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내곡리(內谷里) [ 안골, 내곡]

이 지역 명칭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황양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는 풍양현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후 양주목 별비면 지역으로 1914년 1일

내곡리·영지동·동촌리·서촌리 그리고 전도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곡리라 해서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본래 풍양현(豊壤縣)이 있던 곳으로서 그 안쪽이 되므로 안골 또는 내곡이라 하였다.
동촌과 영서 사이에 '원내곡(元內谷)·안골·역말·역 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내곡의 원래 마을 또는 원래의 개척지라 하여 이렇게 불린다. 원내곡은 '안 골'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내곡리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이 안골이라는 이름 을 한자어화한 것이 내곡(內谷)이며, 이것이 리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역말', '역촌(驛村)'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을 이름의 유래에 따라 '골 안·고을안·내곡교' 등의 지명이 아직 전한다.

◎ 연평리(蓮坪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양주군 접동면지역으로 1914년 비각리·내동리·봉현리의 각 일부와 건천면의 양지 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평리라 해서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연평리에 있는 큰 들을 풍양(豊壤)들 또는 요 연평이라 한다.

궁동 서쪽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을 '요연평(蓼蓮坪)·연평뜰·풍양뜰·풍양 들'이라고 한다. 왕숙천을 끼고 드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으로, 현재의 평야로 개간되기 전에는 토질이 습하고 군데군데 연못이 있다고 하여 '요연평'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연평뜰', '풍양뜰', '풍양들' 등의 여러 이름으로도 불린다.

요연평 북쪽에는 '목화배기 목화배미'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논이 있 다. 예전에 이 곳에서 목화를 재배했던 연유로 '목화배기' 또는 '목화배미'라고 불린다. 이 곳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나 전해지는데, 옛날 어떤 농부가 이 곳에 600여 평의 논을 가지고 있었는데, 흉년이 들었 을 때 너무나 배가 고파 논 600여 평을 팥죽 세 그릇과 바꿔버렸다고 한다.

◎ 부평리 (富坪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과 접동면 지역으로 1914년 부동리의 '부 (富)'자와 후평리의 '평(坪)'자를 따서 부평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부동은 '분토골'이라고도 하 며 '후평'은 뒷벌을 한자화한 것이다.

부평리에는 '능내(陵內)'·능내동·능안'이라는 마을 이름 이 있는데, 조선 제7대 세조의 능인 광릉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능내' 혹은 '능내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 한다. 능안쪽에 있다고 해서 '능안'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살내벌'이라는 이름은 광릉 앞 에 있는 벌판을 말한다. 옛날 차수복이라는 사람이 임금의 능에 참배를 하러 가는데, 부채로 얼굴을 가 리지 않고 그냥 갔다. 이에 임금에 대한 불경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차수복을 동구 밖에서 참수하려 하 였다. 그런데 차수복은 동구 밖까지 춤을 추면서 끌려갔다. 이 때 마침 임금이 능에 참배를 하고 내려오 다가 이를 보게 되었다. 임금은 곧 참수를 당해 죽을 사람이 희안하게 춤을 춘다고 해서 차수복을 살려 주라고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부채도 하사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수복이 춤을 추었던 장소 를 임금이 '살려줘라'고 한 연유에서 '살내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팔야리(八夜里) [여덟밤이, 팔야]

조선시대에 태조가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 곳에 이르러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태조가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여 '여덟밤이' 또는 '팔야'라 하였다고 한다.

남양주시 서쪽을 관통하여 흐르는 '왕숙천'도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숙(王宿)'이 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는 함흥 으로 가버렸고, 이에 태종은 사자를 보내 부친이 돌아오도록 백방 노력했으나, 태조는 일체 거절을 하 고, 사자들마저 모두 죽어버렸다. 태종은 궁리를 거듭한 끝에 태조의 사부라 할 수 있는 무학대사를 보 내어 겨우 태조를 환궁시킬 수 있었다. 이 때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면 팔야리에서 여덟 밤을 자고 갔으므로, 이 마을 이름이 '여덟배미' 또는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 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내를 '왕이 자고 갔다'는 의미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 른 하나는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동구릉과 세조의 광릉 등 여러 임금들의 능이 있는 하천이라는 뜻에 서 연유했다는 주장이다. 세조가 광릉에 안장(安葬)된 후, '왕이 길이 잠든다[永宿]'는 뜻에서 '왕숙 천'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왕산내' 혹은 '왕산천(王山川)'라고도 부르는 데, 이 역시 '왕의 산[陵]'과 관련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에 도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팔야리에는 '아작고개·아재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은 옛날에 흉년이 들었던 시기에 어떤 농부가 너무 배가 고파 이 고개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 먹고 말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 전해진다. 혹은 '아지작고개'라고도 불리는데, 호랑이가 이 고개에서 사람 을 '아작'하고 잡아먹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전한다.

◎ 진벌리(榛伐里) [갬벌, 진벌]
개암나무가 많은 벌판이므로 '갬벌' 또는 '진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벌리에는 '진벌·가얌 벌·가얌벌리·갬벌'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얌나무(개암나무)가 많아서 '가얌 벌', '갬벌' 등으로 불리다가 '진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 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이 곳은 가얌나무가 많았는데 가얌나 무를 베어버리고 형성된 마을이어서, '가얌벌리'로 불리다가, 이의 한자어인 '진벌(榛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름 유래에 따른다면, 이 마을은 '가얌나무를 베어버리고 이룩한 마 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 금곡리(金谷理) [쇠파니, 쇠푸니, 금곡]

조선시대부 터 한말까지 이 지역은 양주군 진벌면지역으로 1914년 금곡리의 '금'자와 주곡리의 '곡'자를 따서 금곡 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제되었다.
금곡리에는 '쇠푸니·쇠파니·금곡·원금곡'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로 부터 이 지역에 쇠가 많이 나서 '쇠푸니', '쇠파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금곡(金谷)'이 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쇠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금곡마을이 점차 커지고 리 이름으로도 쓰이게 됨에 따라, 구별을 위하여 원래의 금곡마을이라는 의미의 '원금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 다.

금곡리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주곡(주리골·주유골)'이라는 지명은 삼면이 두루 산으로 둘 러쌓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두릅이 많기 때문에 주곡이라 부 른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주리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이곳이 주리를 틀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밖에도 '주유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씨(柳氏)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 라 한다.

한편 용신신화와 관련된 '벼락소'라는 이름도 있는데,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벼락을 맞고 이 곳에 떨어졌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벼락이 쳐서 바위가 쪼개져서 이소(연못)의 깊은 물 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벼락소라 불린다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과는 달리 나름의 체계를 갖 춘 장자못 전설 유형의 이야기도 전하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신감역이라는 부 자가 살았는데, 굉장히 인색했었다고 한다. 하루는 동냥하러 온 중에게 쇠똥을 퍼서 주었는데,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안타까운 마음에 바가지를 씻고 쌀을 한 바가지 퍼주었다. 이에 중이 "돌아보지 말고 나 를 따라 오라"하여 뒷산으로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고 폭우가 쏟아졌다. 며느리가 겁 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집은 벼락에 맞아 불이 붙었다가, 쏟아져 내린 폭우에 깊은 못이 되어버렸 다. 신감역의 가족들은 이 때 내려친 벼락에 맞아 모두 죽었고, 그 며느리 역시 뒤를 돌아 본 까닭으로 산중턱에서 그만 바위(혹은 돌부처)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신감역의 집터는 쏟아져 내린 폭우에 못이 되었는데 이것이 벼락소라고 한다.

진접읍 금곡리, 진벌리와 수동면 수산리 경계에는 높이 720m의 '철마산'이 있는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나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서는 '검단산 (黔丹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검단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철마산'이라고만 부르 며, 철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름 유래를 말한다. 북쪽 봉우리인 '검단산'은 '검은 산' 또는 '수풀이 우 거진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남쪽 봉우리인 '철마산'은 쇠푸니의 이름 유래와 관련이 되어서 '쇠 를 캐는 광산'과 관계가 있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철마산'은 남북 봉우리가 달리 불리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0년대에 지형도를 만들 때, '철마산'만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검단산'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두 봉우리를 모두 '철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자료출처 : 남 양주시 역사문화길잡이 - 우리고장남양주(남양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