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사망]독재 세습 ‘37년 철권통치’ 막내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12.19 15:11
수정 2011.12.19 15:11
[동아일보]
굶주린 수백만 명의 인민이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외치도록 만들고 온 나라의 산해진미와 값진 재화, 지배 엘리트들의 충성을 한손에 거머쥐었던 절대 권력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손길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애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그 권력을 물려받아 '수령절대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해 온 과정이었다. 이는 '북한 현대사'의 한 단락임과 동시에 '북한 몰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출생과 성장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근교에서 김 주석과 어머니 김정숙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의 공격을 피해 그곳의 소련군 영내로 옮겨 왔을 때였다. 1984년 이후 북한은 그가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며 이곳을 성지화했지만 이는 그의 우상화를 위한 거짓이다.
광복 후 1945년에 어머니를 따라 북한에 온 그는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졸업 당시 제출한 논문 제목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었다.
○ 아버지의 권력승계 과정
북한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3대 부자 세습을 이룬 유일한 나라다. 특히 김 위원장으로의 권력 승계는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차지한 성격이 짙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어려서부터 권력욕이 강했고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1959년 1월 아버지를 수행해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가 열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김 주석의 부관들과 의사 간호사 등 수행원을 집합시켜 놓고 하루 일과를 보고받고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자기 아버지가 나갈 때 부축을 하고 나서는가 하면 신발을 신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47세로 원기왕성해 부축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아들의 부축을 받을 때면 마냥 흡족해 했다."(황 전 비서의 증언)
김 위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한 활동의 속도를 높였다. 아버지를 신격화하고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통해 경쟁자인 삼촌 김영주 및 계모 김성애 등과의 충성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예술적 재능을 발휘해 혁명 1세대들의 환심을 샀다. 김 위원장이 지휘해 만든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공연을 관람한 노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74년 2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는 그를 당내 권력핵심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결정했다. 이후 북한 언론은 그를 '당 중앙'으로 호칭하며 사실상 공식 후계자로 대했다. 공직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 만이었다.
○ 수령 절대주의 체제의 수립
김 주석이 사망한 1994년까지 20년 동안 북한의 역사는 김 위원장이 자신의 후계 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신격화 및 자신의 우상화를 지속하며 북한 정치와 경제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이 기간에 집단지도체제 등 당-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성은 퇴색하고 유일지도체제인 봉건적 '수령 절대주의 체제'가 확립된다.
이 시기에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의'로 변질됐다. 김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교리인 '유일사상 10대 원칙'과 후계 체제 정당화를 위한 '혁명적 수령관' 등은 모두 김 위원장의 작품이다. '광폭정치'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조선민족 제일주의' 등의 담화도 창안해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실질적인 통치 권력은 그가 만들어 낸 '측근정치'와 '수령경제'라는 정치 경제적 제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소수의 측근을 분할 통치하고 서로 감시하도록 하며 이들에게 국가 희소자원에 대한 점유권을 나눠주고 그 운용의 수익을 통치자금으로 회수하는 방법으로 지배 엘리트들을 장악했다.
○ 경제위기와 개혁개방의 지연
김 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1974년 전후를 정점으로 북한 경제는 끝을 모를 내리막길을 걸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모토로 한 폐쇄적 경제 시스템은 세계 자유시장과의 교역을 가로막아 북한 경제를 악화시킨 주된 요인이었다.
더구나 김 위원장은 정치와 사상을 경제논리보다 앞세우며 '3대혁명소조운동' 등 대규모 '돌격전' 등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신격화, 대외적인 체제 선전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1988년 올림픽 개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듬해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45억 달러 정도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11월 동독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단 체제 전환으로 '지원군'까지 잃은 북한 경제는 최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중국과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거부했고, 측근들도 감히 그의 앞에서 개혁개방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 아버지의 죽음과 고난의 행군
김 주석이 1994년 7월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돌연 사망하자 일각에선 김 위원장이 관련돼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 일했던 탈북 관료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통일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실정이 드러날까 두려워 경제위기의 실상을 아버지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참담한 경제현실을 알게 된 김 주석은 아들을 추궁했고 이로 인한 부자 갈등의 와중에 김 주석은 사망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북한의 유일 최고지도자가 됐지만 1997년까지 3년 동안 '유훈(遺訓) 통치'를 내세우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오히려 "당 일꾼들에게도 잘못이 있다"며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황 전 비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경제위기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350만 명가량이 굶어 죽었다.
○ 실패한 국가재건 프로젝트
김 위원장은 1997년 10월 8일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함으로써 공식적인 북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을 기치로 내걸고 붕괴 직전의 국가 재건에 나섰다.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대북포용정책에 부응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하며 대남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또 2002년 10월 이후 제2차 핵 위기를 일으켜 미국과 담판을 시도하며 경제적 지원을 얻어냈다. 2002년에는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혁개방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2000년대 경제의 개혁개방 조치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2006년 이후 북한 경제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햇볕정책의 단맛에만 집착했고 남북관계는 2008년 한국의 이명박 정권 등장 후 일순간에 악화됐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지난해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사건 등의 도발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강경해진 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압박에 부닥쳤다. 지난해 말 전격 공개한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도 6자회담 복귀에 걸림돌이 됐다.
○ 김정일의 여인과 가족
생전의 그는 숱한 여성편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그와 부부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여인만 네 명이다. 김 위원장은 결혼하기 전인 1969년부터 영화배우 출신 유부녀 성혜림과 동거했고 1971년 아들 정남을 낳았다.
1974년 중앙당 전화교환수 출신인 본처 김정숙과 결혼해 딸 설송을 낳았다. 1976년부터는 무용수 출신 고영희를 애첩으로 맞아들였다. 고 씨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을 각각 낳았다.
네 번째 여자는 김옥이다. 개인 비서 겸 부인으로 알려졌으며 김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병상을 지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굶주린 수백만 명의 인민이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외치도록 만들고 온 나라의 산해진미와 값진 재화, 지배 엘리트들의 충성을 한손에 거머쥐었던 절대 권력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손길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애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그 권력을 물려받아 '수령절대주의'라고 불리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해 온 과정이었다. 이는 '북한 현대사'의 한 단락임과 동시에 '북한 몰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출생과 성장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롭스크 근교에서 김 주석과 어머니 김정숙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항일 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의 공격을 피해 그곳의 소련군 영내로 옮겨 왔을 때였다. 1984년 이후 북한은 그가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며 이곳을 성지화했지만 이는 그의 우상화를 위한 거짓이다.
광복 후 1945년에 어머니를 따라 북한에 온 그는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졸업 당시 제출한 논문 제목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었다.
○ 아버지의 권력승계 과정
북한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3대 부자 세습을 이룬 유일한 나라다. 특히 김 위원장으로의 권력 승계는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차지한 성격이 짙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어려서부터 권력욕이 강했고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1959년 1월 아버지를 수행해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가 열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김 주석의 부관들과 의사 간호사 등 수행원을 집합시켜 놓고 하루 일과를 보고받고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히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자기 아버지가 나갈 때 부축을 하고 나서는가 하면 신발을 신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47세로 원기왕성해 부축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아들의 부축을 받을 때면 마냥 흡족해 했다."(황 전 비서의 증언)
김 위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한 활동의 속도를 높였다. 아버지를 신격화하고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통해 경쟁자인 삼촌 김영주 및 계모 김성애 등과의 충성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예술적 재능을 발휘해 혁명 1세대들의 환심을 샀다. 김 위원장이 지휘해 만든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공연을 관람한 노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74년 2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는 그를 당내 권력핵심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결정했다. 이후 북한 언론은 그를 '당 중앙'으로 호칭하며 사실상 공식 후계자로 대했다. 공직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 만이었다.
○ 수령 절대주의 체제의 수립
김 주석이 사망한 1994년까지 20년 동안 북한의 역사는 김 위원장이 자신의 후계 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신격화 및 자신의 우상화를 지속하며 북한 정치와 경제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이 기간에 집단지도체제 등 당-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성은 퇴색하고 유일지도체제인 봉건적 '수령 절대주의 체제'가 확립된다.
이 시기에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의'로 변질됐다. 김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교리인 '유일사상 10대 원칙'과 후계 체제 정당화를 위한 '혁명적 수령관' 등은 모두 김 위원장의 작품이다. '광폭정치'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조선민족 제일주의' 등의 담화도 창안해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실질적인 통치 권력은 그가 만들어 낸 '측근정치'와 '수령경제'라는 정치 경제적 제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소수의 측근을 분할 통치하고 서로 감시하도록 하며 이들에게 국가 희소자원에 대한 점유권을 나눠주고 그 운용의 수익을 통치자금으로 회수하는 방법으로 지배 엘리트들을 장악했다.
○ 경제위기와 개혁개방의 지연
김 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1974년 전후를 정점으로 북한 경제는 끝을 모를 내리막길을 걸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모토로 한 폐쇄적 경제 시스템은 세계 자유시장과의 교역을 가로막아 북한 경제를 악화시킨 주된 요인이었다.
더구나 김 위원장은 정치와 사상을 경제논리보다 앞세우며 '3대혁명소조운동' 등 대규모 '돌격전' 등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신격화, 대외적인 체제 선전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1988년 올림픽 개최에 대응하기 위해 이듬해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45억 달러 정도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11월 동독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단 체제 전환으로 '지원군'까지 잃은 북한 경제는 최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중국과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거부했고, 측근들도 감히 그의 앞에서 개혁개방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 아버지의 죽음과 고난의 행군
김 주석이 1994년 7월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돌연 사망하자 일각에선 김 위원장이 관련돼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 일했던 탈북 관료의 증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통일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실정이 드러날까 두려워 경제위기의 실상을 아버지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참담한 경제현실을 알게 된 김 주석은 아들을 추궁했고 이로 인한 부자 갈등의 와중에 김 주석은 사망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북한의 유일 최고지도자가 됐지만 1997년까지 3년 동안 '유훈(遺訓) 통치'를 내세우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오히려 "당 일꾼들에게도 잘못이 있다"며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황 전 비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경제위기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350만 명가량이 굶어 죽었다.
○ 실패한 국가재건 프로젝트
김 위원장은 1997년 10월 8일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함으로써 공식적인 북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을 기치로 내걸고 붕괴 직전의 국가 재건에 나섰다.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대북포용정책에 부응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하며 대남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또 2002년 10월 이후 제2차 핵 위기를 일으켜 미국과 담판을 시도하며 경제적 지원을 얻어냈다. 2002년에는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혁개방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2000년대 경제의 개혁개방 조치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2006년 이후 북한 경제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햇볕정책의 단맛에만 집착했고 남북관계는 2008년 한국의 이명박 정권 등장 후 일순간에 악화됐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지난해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사건 등의 도발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강경해진 한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압박에 부닥쳤다. 지난해 말 전격 공개한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도 6자회담 복귀에 걸림돌이 됐다.
○ 김정일의 여인과 가족
생전의 그는 숱한 여성편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그와 부부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여인만 네 명이다. 김 위원장은 결혼하기 전인 1969년부터 영화배우 출신 유부녀 성혜림과 동거했고 1971년 아들 정남을 낳았다.
1974년 중앙당 전화교환수 출신인 본처 김정숙과 결혼해 딸 설송을 낳았다. 1976년부터는 무용수 출신 고영희를 애첩으로 맞아들였다. 고 씨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을 각각 낳았다.
네 번째 여자는 김옥이다. 개인 비서 겸 부인으로 알려졌으며 김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병상을 지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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