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한 또다른 평가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외척들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의 기록들중 일부. (* 황현은 경술국치에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선비로, 촌철살인의 비판적인 글을 남긴 윤치호와 같으나 윤치호는 우월한 보편인의 입장에서 '윤치호 일기'를 썼다면, 황현은 시대를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후세의 교훈을 위해 매천야록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의 몰락을 외세의 문제도 있지만, 부패한 지도자들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천야록에서 가장 통렬하고 예리하게 비판받았던것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집권층이었다.)
임오군란을 피해 신행으로 가장하여 달아나 한강을 건넌 민비의 가마를 보고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왕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그리고, 민비가 과연 덕을 지닌 국모인가.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임오군란 때 난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 나와 신행 행렬로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에 숨어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보며 딱하게 여겨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요즈음 민비의 입에 실리는 ‘백성’은 위선이고 허구다.
우리는 당시 권력 핵심부의 부패 실상과 이를 응징하려는 민중들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또, 민비는 원자를 얻기 위해 왜 상인에게 많은 왜전(倭錢)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했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해 8월 모 주간 신문에 대중매체의 민비에 대한 미화를 경계한다는 인터뷰 내용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대강, “민중적 합의에서 발발한 동학혁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민비에 대한 미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이라는 내용이었다. 민비에 대한 미화는 구천을 떠도는 숱한 민중들의 원혼을 고려한, 역사의 총체적 의미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왕비 민씨의 모습은 과연 이성적인 것이며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열강을 요리한 여걸'이라느니 '항일 애국열사'니 하는 대접은 그녀에게 당치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친정 식구들의 복록과 권력유지를 위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이다 끝내는 이 땅을 외세의 전쟁터로 만든 일급 망국배였다고 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민비의 행적을 접할 때마다 '아, 이 여인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는 통탄을 수없이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 시해는, 그 시행은 일본인이 했지만 '거사'의 주범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다. 민비시해는 한 마디로 1873년 11월 대원군이 민비의 책동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22년간 계속된 며느리와 시아버지간의 추악이 극에 달한 권력쟁탈극의 종결편에 해당한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침략 야욕에 항거하다 국모가 시해당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영원히 민비시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3년 후인 1885년 청나라가 대원군을 풀어주려고 하자 민영익을 급히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보내 대원군을 계속 붙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민비의 간청을 무시하고 대원군을 환국시키자 민비는 눈에 불을 켜고 대원군의 수족들을 찾아내 처단했다. 대원군이 환국한 지 한달 사이에 이렇게 민씨 척족의 손에 잡혀 죽은 대원군의 측근 인물이 30명이 넘는다.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민비는 그녀의 수족인 척족 민영준을 원세개에게 보내 청국 군대로 동학군을 토벌해 달라고 애원한다. 청국 군대가 출동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규모로 군대를 상륙시켜 마침내 이 땅은 청-일 양국군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모조리 쫓아낸 뒤 단군 이래 최대의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경장을 추진한다. 대원군이 일본에 업혀 민씨 척족을 권력에서 제거한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행동 동기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다시 권력에 복귀시키고 저능아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들(뒤의 순종)을 무사히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았다. 그래서 일본이 위세를 부릴 때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었다는 것이 애국적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민비가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은 것은 결코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백년대계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고육지책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런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털끝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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