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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과 흥선대원군 그리고 민비

은빛사연 2013. 8. 29. 00:24

동학혁명과 흥선대원군 그리고 민비

민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에 붙자 대원군과 일본은 민비 제거라는 공통 목표에 합의하게 된다. 민비시해 사건 당일인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3시, 대원군은 '암여우(민비)를 죽여라'고 외치는 일단의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거처이던 마포 공덕리 별장을 떠나 경복궁으로 향한다. 대원군은 함께 따라나서기를 간청하는 종손자 이준용에게 "너는 여기 남아 있다가 오늘의 거사가 실패하면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말한 뒤 가마에 올랐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민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이로써 22년간 계속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성 잃은 권력투쟁은 대원군이 일본 낭인패와 훈련대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와 민비를 죽임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민비 다시 보기'를 제안하면서 거듭 말하지만, 대원군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국모' '여걸' 등의 이미지로 최근 부활하고 있는 민비의 행적을 엄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곧 망국의 책임소재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며, 우리가 '대충 건너뛴' 일제청산 작업을 새로이 다그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97/np197nn010.html

이성 잃은 시아버지-며느리의 권력투쟁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민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이런 민비의 부정적 행각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끊임없이 궐기하는 가운데 그 세를 키우고 이러한 열망이 농축되어 동학 민중들에 의해 거대한 화산으로 분출되었으니 동학혁명이다.

비록 <고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기록이라지만 민비에 대한 부정적 행적은 놀랍게도 당시 많은 야사(野史)들, 특히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일치하고 있다. 곧, 가까운 무리를 배치(민씨의 세도정치), 백성 착취(탐관오리), 벼슬을 팔고(매관매직),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민란 및 동학혁명) 등 당시 역사적 정황에 일치하고 있다.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조에 의하면 민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세상을 떴다고 전하고, 그 다음날에는 “내(고종)가 왕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王后)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고 기록했다.

1894년. 민씨의 부패 정치로 인해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이르러 마침내 동학 민중이 일어섰다. 4월 27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 5일에 조선 조정의 청병(請兵)에 따라 청군이 아산에 상륙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동학 지도자들은 5월 7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는다.

쇠약한 민씨 정권은 동학혁명군이 재기포했을 때 일본 군대에 동학혁명군 토벌(討伐)을 맡기게 되고,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민심 수습과 국권 탈취의 두 요건을 동시에 거머쥐게 될 ‘민씨 정권의 목’을 요구한다. 민비 시해 사건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민이 같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은 민씨 일파의 부패한 정치 행로와 맞물려 있다. 흔히 동학혁명의 불을 당겼다고 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나, 고부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군을 과잉 진압함으로써 새로운 불을 지핀 장흥부사 이용태는 모두 민비의 매직(賣職)에 의해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일본 군대가 상륙하였고, 결국 청일전쟁은 온 국토가 유린되는 빌미가 되었다.

비의 삶이 어찌 동학혁명사와 분리되어 논의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민비와 민씨 정권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비와 민씨 일파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떤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 때 민영준이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면서 보낸 편지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 고부 등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었습니다. 근래에 동학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십여 고을을 공략하고……임오군란, 갑신정변 두 차례 내란에도 모두 중조(中朝) 병사의 힘을 입어 평정하였습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

http://www.chondogyo.or.k

지난 가을 개혁가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바 있으나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와 협의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공사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후략)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영문편지(날짜미상)-

출처: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p.93

우리의 왕비는 이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우리의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 그녀는 폴란드의 메리나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그녀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

이런 민비의 부정적 행각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끊임없이 궐기하는 가운데 그 세를 키우고 이러한 열망이 농축되어 동학 민중들에 의해 거대한 화산으로 분출되었으니 동학혁명이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명성황후 암살의 중요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순(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과 민비를 암살하기 위해서,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을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천주교에 접근하였으나, 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을 돕지 않고 정치에 관여 않겠다고 하자, 앙심을 품고 천주교인들을 살해하였다.

물론 민비도 흥선대원군을 암살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썼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민비와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 등이 자신들의 권력투쟁에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조선이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열강의 식민지가 될 일은 없었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해서 이 땅을 피와 눈물로 물들게 한 죄는 일제와 민비와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가 공법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주변 열강들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유지하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죄상은 죄상대로 묻되, 민비와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 등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