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단 과 다대포 몰운대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을 아십니까? 윤흥신 공은 명종 즉위년에 소윤 윤형원 일파에 의해 일어난 을사사화로 사사된 대윤 윤임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의 사적이 인멸된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윤흥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부산 수정동 고관입구로 갈라지는 삼거리공원에 윤흥식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
고향과 나라를 지키다가 순직한 윤흥신 장군의 영혼을 만나러 갔다. 윤흥신 첨사는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다대진을 공격하자 그의 동생 흥제와 함께 군관민을 이끌고 왜군을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대진의 사적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경상감사 조엄이 윤흥신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을 입수하고 송상현공과 정발공의 사당에 윤흥신공이 빠져있음을 안타까이 여겨 조정에 포상을 청함으로써 그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윤공단을 세우고 제사일은 음력 4월 15일로 정하였다.
이 단의 중앙에 있는 비석은 전면에 첨사윤공흥신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라 쓰여 있고
비의 양측에는 의사윤흥제비(義士尹興悌碑)와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있다.
지금은 다대동민이 중심이되어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윤공단의 입구를 들어서니 계단 오른 쪽에 다대첨사 관찰사 등 다대진(지금의 사하) 지역에 혜택을 베푼 인물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선정비(善政碑)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
대부분 군역감면 등의 시혜내용을 담고 있으며 혜택을 받은 군졸(軍卒), 군뢰(軍牢), 사령(使領) 등이 건립했다. 이 비석은 사람의 통행이 많은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으나 1970년대 이후 도로확장 등 도시계획 사업으로 인해 원래 위치에 보존하기가 어려워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선정비의 주인공을 보면 첨사(僉使) 이승운(李乘運)의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첨사(僉使) 이동식(李東植)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관찰사(觀察使) 이경재(李景在)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첨사(僉使) 이동식(李東植)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관찰사(觀察使) 홍종영(洪鐘英)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진리(鎭吏) 한광국(韓光國)의 구폐불망비(球弊不忘碑) 관찰사(觀察使) 서헌순(徐憲淳)의 만고불망비(萬古不忘碑) 병조판서(兵曺判書) 민응식(閔應植)의 만세송덕비(萬世頌德碑) 첨사(僉使) 정제빈(鄭濟斌)의 송덕불망비(頌德不忘碑) 첨사(僉使) 김정근(金炡根)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겸목관(兼牧官) 이득형(李得馨)의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청덕선진비(淸德善賑碑) 겸감목관(兼監牧官) 고도성(高道成) 비(碑) 등 열세 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윤공단을 방문하여 호국보훈을 위해 순절한 조상의 얼을 기리고 애국, 호국의 의지를 다져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멀리 보이는 몰운대로 발길을 옮긴다. 부산의 등줄인 금정산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빠져들며 형성된 곳이다.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몰운대라고 불려지게 되었다는 몰운대와 다대포해수욕장
파도가 모래에 지나온 삶의 발자국을 새긴다. 몰운대의 그림자가 넓은 모래 위를 얼싸 안는다. 조용한 바다와 거품의 파장은 다대포해수욕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윤공단의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몰운대를 찾았다. 혼자만의 고독으로 다대포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몰운대 숲길을 방랑자가 되어 걸어 본다.
몰운대의 산책길은 솔숲길로 솔잎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유독 아름답다. 동래부사 이춘원의 한시 몰운대 시비가 천혜절경 몰운대의 환상적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沒雲臺 浩 蕩 風 濤 千 萬 里 호 탕 풍 도 천 만 리 白 雲 天 半 沒 孤 臺 백 운 천 반 몰 고 대 扶 桑 曉 日 車 輪 赤 부 상 효 일 차 륜 적 常 見 仙 人 駕 鶴 來 상 견 선 인 가 학 래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 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회원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다대포객사를 만난다. 몰운대 정상으로 이전 복원하면서 벽과 안의 구조와 시설물은 없어진 그대로 있어 누대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의 하나로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님을 향해 망배를 드리던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 보기도 하고 순국선열의 넋이 어린 곳을 찾아다니며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가다듬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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