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사 윤흥신 순절비문
옛날 임진왜란 때 동래에서 제일 먼저 전투가 시작 되었는데.
동래성을 둘러싸고 진을 지키신 십 수 명의 신하들
중에서 그 충절이 크게 나타난 사람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그리고 다대포 쪽에는 윤흥신공이 있으니 이들 세 사람을 동래 순절신이라 부르고
동래부 사람들은 충렬사를
지어 송,정 두분을 제사지내 왔으며, 윤흥신 공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 왜병이 부산을 함락하고 병사를 나누어 다대 성을 포위하니
공이 힘을 다하여 첫날은 물리쳤는데 군사가
나와 "적이 반드시 다시 몰려올 것이니 피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자
공은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이튿날 적이 크게 달려드니 드디어 군대가
무너지고 공은 혼자서 종일토록 대적하다가 적이 성을 함락할때 같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후 팔곡 구사맹 공이 조망록 에 이 사실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으니,
공은 찬성 윤임의 아들로 그의 아들 여섯 사람 중에 세 사람은 을사사화
때 아버지 윤임과 함께 화를 당했으며
윤흥신공이 다대진에 부임할 때는 이복동생 흥제 가 같이 와 있었는데
왜적이 공을 핍박하여 시퍼런 칼날이
어지러운 아래서 흥제 는 공을 끌어안고 같이 죽으면서 끝까지 손을 풀지 않았고
죽은 후 에도 손을 풀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두 시신을
같은 관에 넣어서 매장을 했으니 이 어찌 기이하고 열렬하다
아니하리오.
그리고 백여년이 지나 나의 선친이 동래부사에 이어
조선통신정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 왔으므로 공에
대한 순절내용을 누구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고,
이에 동래 충렬사에서 공을 제사지내지 않음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이런 사실을 밝혀 조정에서는
이에 공에 대한 일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해문은 선친이 조선통신 정사로 갈 적에 상객이
되어 같이 간 사람으로 그가 다대첨사로 부임할
때 선친께서는 윤흥신공에 대한 사실을 적어 주었는데,
그는 이를 벽에다 게시해놓고 비석을 세우고자 했으나 일이
성사되기 전에 딴 곳으로 전직 하게 되어 다대를 떠났고,
그 후에 부임해온 첨사들은 모두가 세속에 젖어 속내를
말하지 않으므로 이일은 그냥 내버려 두어서 될것이 아니기에
이해문 이 해 두었다는 돌비석이나마 찾아보려 했으나 그것마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윤공에 대한 사적이 잊혀질까 두려워 이 비문을 지어
장차 이해문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보국승록대부 판돈녕 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지 경연춘추 관사 조진관
내 종응이 동래부사를 영 받아 임지로 떠날 때 에 현
영의정 조인영 대감이 이 비문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동래부 에는 충렬사가 있는데 옛날에는 송.정 양신만
제사를 지냈지만
다대 첨사 윤흥신 공도 같이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은 나의 조부가
한 일이며 이러한 사실을 위해 나의 선친이 이 비문까지 지어
두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비석이 세워지지 않고 있으니
그대가 임지에 부임하거든
나의 뜻을 받아 들여 윤공의 비석을 세워 달라 하므로 나는 이 일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여기에 비석을 세우나니,
오호 떨어진 의전을 바로잡고 빠뜨린 일을 찾아 맞아서 일을 성사시킨 운석
대감은 이로 하여 능히 선대의 뜻을 받들었고 충신을 받들고 절사를 표창
함은 이 또한 신하가 지켜야 할 책무이니 내 즐거이 이일을 마무리 한다.
서기 1841년 첨사순절 후 248년 동래부사 홍종응
눈빛이 형형한 손 대영 다대 119 센타장의 헌화모습
향사 봉행을 진행한 다대 문화 연구회한건회장및정승옥수석부위원장
최차호부산초량 왜관연구회회장님과회원들이향사를끝내고이경훈사하구청장님과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