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 혼(魂)이라면 한 건 선생은 인구 5만의 다대포를 지탱하는 혼이다. 그런 선생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이야기를 시작하자 선비의 꼿꼿함이 서릿발 같다.
“2001년 어느 날 동네 유지분들이 집으로 찾아오셨더군. 지역의 향사(享祀)를 집전할 사람이 없다며 그 일을 맡아달라는
거였지. 그런데 그걸 거절할 명분이 없는 거야. 그러니 어쩌겠나.”
젊은
시절 상사원으로 외국을 두루 다니며 성공적인 활동을 펼쳤던 선생이 퇴직 후 쾌적한 노후를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임진왜란 당시 다대첨사를 지낸 윤흥신 장군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게 되는 그 일은 선생에겐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수락한
선생은 이후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향사가 어떻게 모셔지고 있는가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하려고 보니 축문이 없는 거야. 그래서 축문을 짓기 위해 윤공단을 찾아 비문을 살쳐보게 됐는데 놀랍게도
비문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었지. 읽어 내려가는데 눈을 뗄 수 가 없더군.”
그날
이후 선생은 자석에 끌린 것처럼 임진왜란 초 다대성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비운의 무장에 대한 연구에 빠져들게 됐다고 했다. 많은 자료들을
수집, 그 속에 숨겨진 윤흥신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내용들을 추출하는 한편 당시 부산에 있던 해군 3함대사령부를 찾아 다대성전투에 관한 부분들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충열사지’를 비롯, ‘징비록’, ‘난중일기’, ‘조엄세록’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아들이
일본 황실도서관에서 찾아준 ‘文祿慶長の役’ 같은 자료들을 미친 것처럼 뒤지기 시작했지.”
수집한
자료들 속에서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화(士禍)에 휘말려 무려 32년간의 관노(官奴)생활을 해야 했던 한 사내가 마침내 풀려나
무장이 된 이야기,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야했던 비운의 인물, 하지만 마지막 부임지에서 왜군의 침공에 맞서 장렬하게 산화해 간
충절의 화신, 특히 그런 그의 충절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조엄, 조진관, 조인영으로 이어지는 풍양 조씨 삼대(三代)에 걸친 아름다운
노력은 선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시작된 윤흥신에 대한 연구로 다대성 전투의 많은 것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의 그런
노력은 해군이 윤 흥신공의 향사에 직접 참가하게 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첫 번째가 윤흥신 첨사의 기일과 관련한 부분이다. 현재 윤 첨사의 향사는 음력 4월14일에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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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윤흥신 공 향사 모습. 아래의 사진 가운데 독축을 하는 이가
집례관인 한 건 다대문화연구회 회장이다. |
“비문에 의하면 다대성으로 들어온 왜군은 첫날 전투에서 장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물러갔다가 이튿날 다시 침공해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첨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단 말이야.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음력 4월13일 오후 부산 앞마다에 진을 친 왜군은 다음날 새벽(음력
4월14일) 부산진성을 침공, 성을 함락시켰거든.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군이 곧바로 다대성으로 병력을 보냈지만 첫 침공에서 패퇴하고 둘쨋날인
4월15일 다대성을 함락시켰다면 윤 흥신 첨사가 전사한 날은 당연히 4월15일이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왜 4월14일 제사를 지내냔
말이야.”
선생의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다. 첫째,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들어온 4월13일 곧바로 부사진성을 함락시키고 그 중 일부가 다대포로 들어왔을
경우다. 이 경우 선생의 주장대로 임진왜란의 개전일은 4월13일이 되어야 한다. (유성룡의 ‘징비록’엔 임진왜란의 개전일을 음력 4월13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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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4일 열린 한 건 다대문화연구회 회장의 '다대포
역사 이야기' 출판기념회 모습. 사진 위는 한 건 회장이 해군작전사령부 관계자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는
모습. |
둘째, 다대성으로 들어온 일본군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제1군이 아닌
김해에 상륙해 추풍령을 넘은 구로다 기요마사의 제3군일 가능성이다. 하지만 어느 부분도 확인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윤흥신 첨사의 기제(忌祭)는
음력 4월14일에 거행되고 있다.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또
다른 문제는 다대성을 침공했던 왜군이 첫날 물러간 것을 임진왜란의 첫 번째 승전으로 봐야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은 당시 한양의 수비를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부원수였던 신 각이 경기도 양주의
해후령에서 일본군의 수급 70여 급을 베었다는 해후령전투로 알려져 있거든. 하지만 다대성의 첫날 전투에서 왜군이 패퇴했다는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다대성전투야말로 임진왜란을 통틀어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나.”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해군사관학교의 이민용 교수가 지난해 말 펴낸 ‘이순신 평전’ 110쪽과 453쪽에서 다대성전투가 임란 최초의 승전기록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등 고무적인 분위기다.
연구를
계속할수록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기록들이 오류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부문들이 심하다는 데 대해 선생은 날 선 비판을 쏟아놓았다. 그 중
하나가 현재 다대동 산144번지에 있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 다대포객사에 관한 것이다.
“본래의 객사는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졌고 남아있던 다른 건물을 임시객사로 사용했는데 이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해체해
자국으로 가져가버렸거든. 때문에 지금의 객사는 남아있던 첨사청 건물을 뜯어다 복원해 놓은 거란 말이야. 그런데 객사란 명칭을 붙이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니겠나.”
하지만
향토사학자로서의 선생의 연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인간적인 것들도 없지 않다. 일개 아전으로 구폐타파(舊弊打破)에 앞장섰던 진리(眞吏)
한광국과 ‘촌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나무꾼여인과 윤흥신 첨사의 로맨스가 그것이다.
“촌녀는 당시 관아에 화목(火木)을 조달하던 여인이었는데 윤 첨사가 그녀를 어여삐 여겨 결국 관아에 두고 동거하기에
이르거든. 관아엔 관기도 많았을 텐데 말이야. 아마도 32년간 노비생활을 겪었던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어.”
현재
선생은 자신의 연구를 잇기 위해 그동안 함께 해왔던 ‘다대문화연구회’회원들을 상대로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윤흥신 첨사의 32년간의 관노생활에 대한 행적을 밝히고 싶어. 그리고 다대성을 침공했던 왜군들이 어느 부대 소속이었는지도
밝혀져야 하겠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윤공의 묘에 합장돼 있는 두 구의 시신을 분리해 제대로 된 분묘를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비문에서
포공동사(抱公同死)로 표현된 윤흥신과 그의 아우 흥제의 시신을 분리해 각각의 분묘를 만들고 싶은 건 그의 충절을 기리는 후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는 선생의 생각에 공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