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흔적/자료실

경기도 광주시의 지명유래와 주요 문화재

은빛사연 2012. 5. 1. 00:49

(경기도 광주시의 유래)

 

광주는 예로부터 경기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뜻에서 한자로 넓을 광(廣)자와 고을 주(州)자를 썼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시의 문화재)

 

1.남한산성

 

종 목  사적  제5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2.광주 조선백자 요지

 

종 목 사적 제314호  

지 정 일 1985.11.07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외 초월,곤지암,도척,남종,중부,송정(6개 읍면동)

시 대 조선시대

 

도요지는 그릇이나 자기를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남종면·중부면·퇴촌면 등 광주시 일대에는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흙이 나오며, 나무와 물이 풍부하다. 제품의 공급지인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한 운반의 편리성으로 인해, 조선 영조 28년(1752)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의 분원으로 지정됐다. 그 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285개소의 가마터가 이 일대에서 번창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국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분원리 가마터는 개인에게 경영권을 주게 되었다. 그 후 여러 계층의 수요와 요구에 따라 자기의 모양과 무늬가 다양해졌으며, 청화백자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가마터의 구조는 오름가마이며, 계단식가마도 확인되었다. 여러 모양과 무늬를 새긴 자기들이 출토되었고, 글씨가 새겨진 도자기를 통해 제작시기도 알 수 있다.

 

이 일대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던 중심지였기에 조선 도자사 연구에 기반이 되는 곳으로서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3.남한산성 행궁

 

종 목  사적  제480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35-6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남한산성 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인 남한산성행궁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자 한다

 

인조 4년(1626)에 완성한 행궁은 내행전인 상궐궁과 외행전인 하궐, 의정문, 내삼문을 갖추고 있으며, 행궁 동편에는 손님이 머무는 건물인 인화관이 있다. 행궁지는 산성호텔 뒷편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었다. 건물터는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단은 상궐터, 중단과 하단은 하궐터로 추정된다. 현재 남한산성행궁지(상궐터)에는 상궐, 남행각, 북행각, 재덕당, 좌승당 등이 복원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북한산성 행궁, 화성 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궁 중 하나로, 기록으로 볼 때 북한산성 행궁보다 규모도 크고 왕이 실제로 머물렀다 한다.

 

4.수어장대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5.숭렬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6.청량당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

시 대 조선시대

 

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모시고 있는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훗날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 뒤에 이회가 쌓은 남쪽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 정면에 이회의 영정(초상화)가 있고 그 양옆으로 처첩(부인과 소실)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

 

 

7.현절사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310-1

시 대 조선시대

 

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을 당하였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 장소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8.침괘정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1

시 대 조선시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침괘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현 건물구조로 볼 때 근처에 있었던 무기고나 무기제작소의 집무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연무관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0-1

시 대 조선시대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연무당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재위 1674∼1720) 때 ‘연병관’이라 쓴 현판을 하사하여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무술을 닦은 무사들 중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선발되어 한양으로 진출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벽은 널벽으로 좌우 벽에 널문을 3개씩 설치하였다. 앞면은 벽이나 문이 없이 개방되어 있는데 흔적이 남아있어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0.광주 유정리 석불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 222-7  

시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원래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나 많은 칠 때문에 원형을 잃고 있다.

 

몸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둥근 머리묶음이 있다.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굵고 완만한 U자형 주름이 있다. 양 손은 배에 모아 왼손 바닥위에 오른손을 올리고 양손의 엄지를 맞댄 모양을 표현하였다.

 

불균형한 신체 비례, 좁은 어깨, 작은 손, 형식적인 옷주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광주유정리 좌불상 사진

 

11.광주 극락사 석조지장보살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1호 
지 정 일 2006.06.19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오포읍 양벌리 825 
시 대 조선시대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지장보살로는 양손을 마주잡은 선정인의 수인이 희귀할 뿐 만 아니라 석조불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복장공이 있으며, 불상양식도 16-17세기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극락사는 광주시 백마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창건연대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알수는 없지만 극락사에 관한 역사는 남한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624년(인조2년)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산성을 증축했는데 여기세 동원된 의승들의 거주처로서 극락사와 옥정사의 두절이 있었고, 많은 의승들은 수용하기 위해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을 새로 지었다.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극락사 대웅전의 주존불상의 오른쪽에 따로 불단을 마련하여 봉안되어 있다.


이 지장보살좌상은 화강암을 정교하게 쪼아 만든 상으로 높이는 49.1cm이고 어깨폭은 20.2cm이며 밑바닥면에 15.cm 폭의 둥근 복장공이 있고 이 구멍은 얼굴 부분에서부터 바닥 까지 뚫려 있어 원래는 복장물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복장물은 원래 금동이나 목조, 소조불상에서 많은 예가 발견되지만 석조불상의 경우에도 이와 같이 밑바닥에 구멍을 내에 복장물을 넣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손은 앞으로 모은 선정인의 모습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민머리의 머리 모습에서 지장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후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빨갛고 둥근 보주를 손 안에 올려 놓았다.


이 보살상은 크고 동그란 얼굴에 어깨가 좁고 허리가 짧은 편이지만 무릎이 넓어 안정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에 반달형의 변형 편단우견식의 법의를 걸치고 속에 편삼을 입은 변형통견식이며 법의의단이 살짝 반전하면서 흘러내려오거나 가슴 아래 수평으로 처리 된 상의와 띠매듭 등이 특징적이다. 보살상의 또 다른 특징은 양 다리 사이에 세모꼴로 흘러내린 치맛자락의 표현을 들 수 있다.

 

12.맹사성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1호

지 정 일 1974.09.26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직동 산2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인 고불 맹사성(1360∼1438)선생의 묘소이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7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죽을 먹으면서 묘 앞에서 상을 치루어 고향에 효자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대사헌·우의정·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다.『태종실록』을 감수하고,『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어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봉분 앞에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조선 초기의 양식이 잘 드러난다. 봉분의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13.최항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3호 
지 정 일 1976.08.27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산1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동량 최항(1409∼1474) 선생의 묘소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종 27년(1445)에는『용비어천가』를 한글로 풀이하였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선생은 40여 년간 조정에서 많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동국통감』,『경국대전』,『세종실록』,『세조실록』등 각종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문장력이 뛰어나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고 서적들을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개인 저서로는『태허정집』,『관음현상기』가 있다.


봉분 뒤는 반달 모양으로 흙을 둘러 쌓았고 봉분 아래에는 반원 모양의 돌을 이용하여 봉분 끝을 마무리 하였다. 봉분 좌우에는 봉분을 향해 2기의 묘비가 있는데, 우측의 묘비는 당시에 있던 것이고, 좌측 묘비는 선생의 17대손이 세운 것이다. 봉분 앞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산 아래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14.허난설헌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묘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으며, 친정집에 옥사가 있는 등 연속되는 불운에서 오는 고뇌를 시를 쓰며 달래다가 선조 22년(1589)27세에 생을 마쳤다.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의 일부는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 )·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15.신립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장공 신립(1546∼1592) 장군의 묘이다.

 

선조 즉위년(1567)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16년(1583)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나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3도 순변사로 임명되었는데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죽은 후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부인 전주 최씨와의 합장묘로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묘의 왼쪽에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서 숙종 29년(1703)에 세운 것이다.

 

16.김자수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8호 
지 정 일 1987.02.12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산120-1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 정세가 어려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새로 채유후가 지어서 세웠다.
 

 

17.김균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05호 
지 정 일 1987.02.12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89-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의 개국공신인 김균(?∼1398) 선생의 묘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공양왕 때에 전법판서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로로 개국공신 3등 15명 중 제2인으로 정해져서 중추원 부사로 승진되고 익대개국공신이라는 공신이름을 받았으며, 계림군에 봉해졌다. 벼슬은 보국숭록좌찬성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제숙의 시호가 내려졌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다.


묘역은 담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문인석 2쌍, 석양과 망주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석의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묘역 앞쪽 약 80m 지점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병선이 짓고 윤용구가 글을 써서 1905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 묘역의 건립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보이며, 묘비는 그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8.망월사지

 

종 목 경기도기념물 제111호

지 정 일 1987.02.12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4

시 대  조선시대 

 

 산성의 동문에서 북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산 중턱보다 높은 곳에 넓게 펼쳐진 망월사터를 만나게 된다.

 

망월사는 남한산성내에 있는 9개의 사찰 중 가장 먼저 지어진 사찰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를 허물고 불상, 금자화엄경, 금정 1구를 이곳으로 옮겨와 지었다고 한다. 망월사는 모두 불타버리고 90년부터 점차적으로 새로 짓고 있다. 현재의 자리가 망월사의 주요건물이 있던 자리이고 그 외의 터는 모두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남아있는 망월사의 흔적은 법당터를 마련하기 위해 산지의 경사진 곳에 쌓은 축대와 현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석재, 그리고 건물의 초석이 몇 개 남아있을 뿐이다.

 

 

19.개원사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98-1,2,5

시 대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 있는 개원사터이다. 조선 인조2년(1624) 파손된 성곽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 8도의 승병을 성내 여러 사찰에 주둔케 하였는데, 개원사는 그 중 승병의 총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사찰이다.

 

그후 고종31년(1894)의 갑오개혁때까지 수도 한양을 지켜오던 호국 사찰로 번창하였다가, 1970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리고 작은 건물 1동만 겨우 남게되었다. 선효화상이 신도들과 함께 10여년에 걸쳐 대각전, 요사 건물을 새로이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여러 건물터에서 초석과 돌계단들이 남아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배치를 짐작하게 한다. 유물로는 남한산성 축성시 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 석장, 옹기, 함지들이 남아있다.

 

20.신익희생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

지 정 일 1992.12.3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160-1

시 대 대한제국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1894∼1956)선생의 생가이다.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고종 2년(1865)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옮긴 건물은, 전체적으로 20세기 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안채는 T자형 평면을 이루는데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바깥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사랑방을 두었다.

 

이 집은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 소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21.신흠 묘역 및 신도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

지 정 일 1994.04.20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1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현헌 신흠(1566∼1628) 선생의 묘이다.

 

선조 18년(1585)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였으나 율곡 이이를 두둔한 발언으로 인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으로부터 이이와 같은 무리라고 비난을 받으면서 높은 벼슬을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인조 때에는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임을 받았고, 특히 외교문서의 제작과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묘지는 부인 전의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역 주위는 낮은 구릉으로 둘러 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한 돌)·향로석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무덤 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과 문인석이 있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세운 것으로 그가 손수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묘역의 동남쪽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다. 

신흠묘역 및 신도비 사진

 

22.광주 삼리 구석기유적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88호 
지 정 일 2003.04.2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삼리11외 4필지 
시 대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경기도 종축장(경기도 축산위생연구소) 터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삼리 구석기 유적은 노곡천과 곤지암천이 서로 합류하는 서쪽 부분에 위치하며, 유적 언저리에는 나즈막한 산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사철 메마르지 않은 물줄기가 발달하여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은 당시 구석기인들의 삶에 알맞은 생활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삼리 유적에서 찾은 유물은 약 4천여 점에 이르고 있어, 한강 이남지역에서 펼쳐졌던 경기도의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이 유적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매우 높다.


삼리 유적의 구석기시대 유물은 지금부터 1만년 이전에 쌓인 갈색 또는 짙은 갈색의 토양층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조사된 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토양층 밑으로는 강물의 영향을 받아 쌓인 자갈층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고토양층 안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형성된 3개의 문화층이 밝혀졌다. 가장 아래에 있는 제3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속하고, 그 위에 있는 제2문화층과 제1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3문화층에서 제1문화층에 걸쳐 찍개 또는 여러면석기와 같이 크고 무거운 석기 종류는 고르게 나타나지만, 제1문화층으로 갈수록 그 수가 적어든다.


3개 문화층에서 발굴된 잔손질된 석기 중에서 비교적 자주 보이는 것이 긁개와 홈날 종류이다. 제2문화층에서는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대형 밀개가 출토하여 관심을 끈다. 3개 문화층에서 석기제작에 이용된 돌감의 대부분은 석영과 규암 종류이며, 이와같은 암질의 돌감은 유적 주변의 곤지암천이나 노곡천에서 쉽게 발견된다. 삼리 구석기유적에서 가장 특징을 이루는 돌감은 제1문화층에서 드러난 흑요석이다.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는 제5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가늘고 길죽한 흑요석 돌날(좀돌날)이 많은 양으로 발굴되었다. 한편 흑요석으로 만든 뚜르개, 슴베찌르개, 새기개 등도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23.지수당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24-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현종 13년(1672)에 이세화(1630∼1701)가 지은 건물로 당시 고관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이세화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 폐위시 상소를 올렸다가 문초를 당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그 뒤 복직되어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지수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뒤로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하나는 매몰되어 지금은 두 개의 연못만 남아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다.

 

24.장경사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22-1

시 대 조선시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서울)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다. 전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절에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25.추곡리 백연암부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3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산25-1

시 대 조선싣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사리나 유골을 모셔두는 곳이다.

 

백련암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낮은 받침을 두고,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앞면에 풀꽃무늬를 새기고, 양 옆에는 안상을 옅게 새겼다. 그 위의 받침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으며, 이와 닿아 있는 탑신의 아래에도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둥근 받침대 위로 작은 규모의 머리장식이 얹혀 있는데, 받침대에는 줄지어 있는 구슬무늬가 둘러져 있고, 머리장식은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종모양의 부도 모습을 잘 보여준다.

 

 

26.곤지암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3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 453-20

시 대 조선시대

 

곤지암은 조선 선조 때의 명장인 신립 장군에 얽힌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신립(1546∼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어려서부터 글읽기보다는 무예닦기를 좋아했다.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터졌을 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왜군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왕이 그에게 왜군을 물리치고 오라는 명을 내리니 훈련도 안된 병사 몇백 명을 이끌고 싸움터로 향하였다. 달천지역에서 고니시의 수만 명왜군과 싸우다 참패를 당하자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는데,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던지 병사들이 물속에서 끌어낸 그의 모습이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호령할 것 같은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군의 시체를 이곳 광주로 옮겨 장사를 지내었는데 묘지 가까운 곳에 고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누구든 바위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결국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던 중 어떤 장군이 이 앞을 지나다 왜 오가는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바위에게 핀잔을 주자 벼락이 쳐 바위가 쩍 갈라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 그 후로 더 이상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바위는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개가 조금 떨어져 놓여 있다. 바위 위쪽으로는 약 400년 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서로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위 주변에 있었던 연못터는 지금은 학교와 주택가로 변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7.우리절 오층석탑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지 정 일 2010.12.08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178번지  
시 대 고려시대


도척면 상림리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 해인사의 곤지암 분원으로), 1995년 10월 7일에 설립되어 1996년 5월 8일에 대한불교조계종에 등록하면서 광주시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의 불교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사찰이다. 우리절은 근래 창건된 사찰이지만, 관음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1998년 5월경에 신도가 기증한 것으로 원래 봉안되었던 사찰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석탑의 형태와 비례 및 세부 표현 등에서 제작 시기와 지역에 대한 추정이 가능하다.


오층석탑은 전체 높이가 315㎝로, 석탑의 기단부는 2매의 장대석을 하층기단(139㎝×168㎝)으로 결구하고, 상층기단은 아무런 조식이 없는 면석과 갑석은 네 개의 판석을 맞대고,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높이가 다른 세 단의 탑신받침을 마련하였다. 塔身은 5층으로, 사각의 탑신석들은 각 면에 우주를 낮게 모각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 높이는 1층 탑신 높이에 비하여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1/2의 비례를 하고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석도 1층 탑신석과 마찬가지로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그러나 석탑 중에 3-4층 옥개석과 4-5층 탑신 및 노반은 새로 만들어진 부재들이다. 옥개석 하부에 각 층마다 3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는데, 낙수면은 급한 곡선을 이루고 내려오다가 끝이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의 정상부에는 호각형의 탑신받침을 1단 또는 2단을 새겨놓았다. 옥개석은 정상부로 올라가면서 작아지는 형태를 하고, 상륜부는 방형 노반과 복발 및 보주형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석탑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고, 기단부에 우주와 탱주가 조식되지 않았지만, 1층 탑신석 하부의 별석의 형태와 숫자, 각층 탑신석의 비례, 옥개석 받침의 숫자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석탑을 이은 고려전기 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8.우리절 석조부도 2기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0호 
지 정 일 2010.12.08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 178번지 
시 대 조선시대


요사 뒤편에 위치한 석조부도 2기는 송계당과 낙화당이라는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사찰 측에 의하면 송계당부도는 오층석탑과 같이 신자로부터 기증받았고, 낙화당부도는 관음전이 있는 지역에 흩어져 있던 부재를 발견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절이 있는 주변에는 불당골, 절골, 승방터 등의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역 주민의 말에 의하면 70여년 전까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송계당부도는 옥개석, 원구형 탑신부, 기단석를 갖춘 조선후기 전형적인 석조부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반부는 새로 제작한 하대석은 2중복련 위에 2단 받침이 조각되고, 그 위에 중대석은 팔각 면의 상대와 하대에 모서리마다 연주문 기둥을 세웠으며, 상대석은 세 겹으로 볼륨이 있는 앙련을 조식하였다. 계란형의 탑신 정면에 위패형을 양각한 후에 세로로 「송계당」이라는 당호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1석으로 목조건축의 맞배지붕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급하면서 아무런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다. 이 부도의 주인공 송계당은 조선시대 스님의 당호 중에 흔한 이름이라 법명이 적혀 있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인을 단정지울 수 없다.


낙화당부도는 현재 관음전을 건립하면서 풀숲에 넘어져 있던 부재를 모아 복원하였다고 한다. 옥개석, 원구형 탑신부, 기단석를 갖춘 조선후기 전형적인 석조부도이다. 기반부는 육각형의 하대석에 모서리를 둥글게 깎고, 그 위에 육각의 중대석을 세웠으며, 상대석은 큼지막한 앙련을 조식하였다. 다른 부재로 추정되는 중대석에는 세로 방향으로「낙화당대사승신」이라는 당호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측면을 번안한 전각형으로, 옥개석 하부에 받침대를 표현하고 모서리에는 추녀와 서까래를 조각하였다. 낙수면에 기와등이 표현되고, 합각부에는 높은 내림마루가 있으며 마루 끝에는 용두형 장식이 새겨져 있다.

 

29.조영무 묘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퇴촌면 광동2리 산16
시 대  조선시대


조영무(?~1414)의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의 명으로 조영규 등과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중추원상의사,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후 문하부참찬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 때, 왕명으로 사병의 혁파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 1408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를 거쳐 삼군부영사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0.정충묘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97-1
시 대  조선시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하여 순국한 장군들의 절의를 기리고 제를 드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3번 국도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홍살문과 묘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이곳 쌍령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을 비롯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안동영장 선세강,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2001년도에 광주시에서 수리하고 주변 정화작업을 하였다.


해마다 음력 초사흗날에 광주문화원이 절차를 주관하고 대쌍령리 주민들이 협력하여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정충묘 제례’를 올린다.